[데스크시각-이명희] 유로존의 나쁜 사마리아인들

입력 2015-07-23 00:08

1997년 대한민국은 암울했다. 자고 일어나면 한보, 삼미, 진로, 기아자동차 등 대기업들이 줄줄이 무너졌고, 부도 기업들이 많다보니 한국은행 기자실은 부도난 기업들 기사를 뒤치다꺼리하는 ‘시체 처리반’으로 불릴 정도였다.

국가가 망할지도 모른다는 절박한 상황에서 국제통화기금(IMF)은 풍전등화의 나라를 구할 구세주였고, IMF로부터의 구제금융은 온 국민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다. 대가는 컸다. 살인적 고금리에 재정긴축, 자본시장 개방, 기업 구조조정, 금융기관 해외 매각, 근로자 대량 해고. 멀쩡한 가장들이 졸지에 거리로 쫓겨나고 가정이 해체됐다. 국민들은 나라를 살려야 한다는 한마음으로 장롱 속 금반지들을 꺼냈다.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 3년 만에 구제금융을 모두 갚고 보니 IMF가 그렇게 몰아칠 일이 아니었다는 비판이 나왔다. 일시적 유동성 위기였을 뿐인데 1980년대 중남미 같은 구조적 위기로 판단해 고강도 긴축 처방을 내린 것 아니냐는 거였다. IMF도 나중에 처방이 잘못됐다며 고해성사를 했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랬던 IMF가 2008년 미국발 글로벌 금융위기가 불거졌을 때는 정반대로 움직였다. 미국과 IMF는 자국 금융기관들에 대한 혹독한 구조조정 대신 초저금리에 재정을 퍼주기에 바빴다. 그런 모습을 바라봐야 하는 우리 국민들은 배신감을 느꼈다.

최근 막을 내린 국제 채권단과 그리스의 ‘치킨 게임’은 또 한번 국제자본의 위력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보수 언론들은 소득대체율 95% 수준인 연금 등 과도한 복지 혜택이 오늘의 그리스 위기를 불러왔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그리스에서 소득대체율 95% 연금을 받는 집단은 공무원과 법조인, 교원 등이다. 그리스 노인 빈곤율은 23%로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높은 수준이다. 그리스인들의 근로시간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멕시코, 한국 뒤를 이어 세 번째로 길다. 오히려 고위층의 부정부패와 부유층의 탈세, 해외 재산도피 등이 직접적인 경제위기 원인이다. 경제 체격이 안 되는 그리스를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에 끌어들여 가장 큰 이득을 본 독일의 원죄도 크다.

그나마 제조업 기반의 우리나라는 고환율과 글로벌 경기 회복으로 수출이 늘면서 외환위기를 헤쳐나갔지만 관광산업 등 서비스업 비중이 90%인 그리스는 5년간 채권단 처방대로 허리띠를 졸라맸어도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구제금융으로 민간 빚을 갚는 악순환은 계속됐고 실업률은 25%, 청년실업률은 50%에 육박했다. 민영화의 허울 아래 국영기업들은 외국 자본에 팔려나갔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와 조지프 스티글리츠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 등은 채권단이 강요한 ‘긴축’이 그리스 경제를 옭아맸다며 “3차 구제금융을 받느니 차라리 유로존에서 나가라”고 조언했다. “부채 탕감이 필요하다”는 IMF의 뒤늦은 고백은 채권단 처방이 잘못됐음을 시인하는 꼴이었다.

1980년대 로널드 레이건 정부의 경제 자문으로 핵심적 역할을 수행했던 하버드대 보수적 경제학자 마틴 펠트슈타인 교수는 외환위기 당시 우리나라가 IMF와 맺은 협정을 보면서 “이 협정안의 서너 가지 조항들은 일본과 미국이 오랫동안 한국에 채택을 유도해 왔던 정책의 복사판”이라며 “한국이 곤경에 처하자 예전에 거부했던 무역 및 투자 정책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하는 것은 IMF의 권력남용”이라고 꼬집기도 했다. 그리스 사태를 보면서 새삼 느끼는 것은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나쁜 사마리아인처럼, 부자 나라들이 베푸는 ‘공짜 점심은 없다’는 거다.

이명희 국제부장 mhee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