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2월 22일 오후 2시, 방글라데시 수도 다카 공항에 내렸을 때 나를 맞아준 것은 매캐한 연기와 쓰레기 썩는 냄새였다. 국제공항인데도 내가 보기엔 산업공단의 폐자재 창고 같았다.
방글라데시 사람들은 몸도 날씬하고 이목구비가 뚜렷하게 잘생겼는데 행색들은 너무나 초라했다. 모두 맨발에 걸친 옷은 언제 빨았는지 모를 만큼 때가 꼬질꼬질 했다.
무덥고 비위생적인 이 곳에서 어떻게 살까 한숨이 나왔다. 그러나 이제 이들과 친구가 되고 이웃이 되어야 했다. 나는 이곳의 날씨와 사람들, 문화와 풍습까지 모두 사랑하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인구밀도가 세계 1위라는 방글라데시는 어딜가나 사람들이 바글거렸다. 이슬람교가 국교인 이 나라는 90%가 이슬람교도다. ‘알라’를 신으로 섬기는 거대한 공동체 이슬람은 하루 5번씩 일제히 나마스(기도)를 드릴 만큼 종교가 생활화 되어 있다. 이슬람교가 사람들의 삶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남은 10% 중 7∼8%가 힌두교, 불교가 2%, 기독교인은 0.3% 정도인 것으로 당시에 집계됐다. 종교의 자유를 헌법이 보장하지만 실제로는 자유가 없다고 할 수 있다. 기독교에 배타적이고 자칫 공격을 당하기도해 선교사들이 가장 꺼리는 국가 중 하나이다. 선교사 수도 인근 국가에 비해 적은 편이었다.
아내와 나는 본격적인 선교사역에 나서기 보다 조용히 이곳에 적응하며 선교전략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단 교회 개척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이곳저곳을 물색하다 몰라떽이란 지역을 가보게 되었다.
다카 외곽에 위치한 빈민촌인 이곳 중앙에 함석지붕을 얹은 8칸짜리 건물이 완공돼 있었는데 원하면 임대를 준다고 했다. 가격도 높지 않아 이곳에서 학교를 열면서 예배를 드리면 되겠다 싶어 계약을 했다.
계약 후 차를 세운 동네 어귀로 돌아와 보니 차에 온통 소똥이 발라져 있었다. 외부인이 허락없이 들어왔다는 경고인데 환영인사치곤 고약했다. 알고보니 몰라떽은 보통 지역이 아니었다. 미리 알았다면 계약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곳은 이슬람 종교지도자들이 사는 토종 이슬람 마을이었던 것이다. ‘몰라’는 수염이란 뜻으로 즉 종교지도자들을 의미했다.
막상 이곳으로 이사하고 보니 사방으로 직경 300m 안에 수천명이 모이는 대형 모스크(이슬람 회당)가 5개나 있었다. 나는 참으로 겁 없이 이슬람 본거지의 중심에 교회와 학교를 턱하니 세운 것이다.
문맹율이 70%에 육박한 이 나라는 교육시설이 부족해 누구든 학교만 세우면 대환영이었다. 나 역시 가난한 아이들에게 공부를 무료로 가르치면서 선교를 할 목적이었다.
1996년 3월 1일, 초등학교 1학년생 120명을 받아 교사를 채용하고 개교를 했다. 원래 50명만 받으려 했는데 소문을 듣고 찾아와 떼를 쓰는데 방법이 없었다. 외국인이 더구나 무료교육을 시켜주는 것을 매우 고마워했다.
우리는 미션스쿨을 지향하며 60명씩 2반으로 나눠 수업을 시켰는데 아이들이 외국인학교에 다닌다는 긍지가 대단했다. 난 8칸 중 2칸을 터서 교회성전 형태로 만들어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성도는 아내와 나 뿐이었다. 이곳을 성도로 채워 주십사고 기도하는데 “네가 나가서 먼저 전도하라”는 깨달음을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단순하고 물불 안가리는 나의 성격을 쓰신다고 생각한다. 다음날 나는 바로 전도하러 밖으로 나왔고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이 움막집이 몰려있는 빈민굴이었다. 내가 들어서자 마자 수십명이 나를 애워쌌다. 나는 아랑곳 하지 않고 쓰러질 것 같은 한 움막으로 그대로 들어갔다.
정리=김무정 선임기자 kmj@kmib.co.kr
[역경의 열매] 박천록 (3) “이 땅의 모든 것 사랑하게 해주소서” 기도
입력 2015-07-24 0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