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변에 앉아 울었노라(시 137:1).’ 한인교회로선 미국 동부에 처음 세워진 뉴욕한인교회(이용보 목사)가 1991년 발간한 교회70년사의 제목이다. 일제강점기 나라 잃은 민족의 지도자들과 청년들이 뉴욕 허드슨강 가까이 있는 이 교회에서 눈물 흘리며 기도한 것에 빗댔다. 뉴욕한인교회 교인들은 현재 교회 건물을 다시 짓기 위해 다른 공간을 빌려 예배를 드리고 있다. 철거 한 달 전인 지난 5월 29일 윤영호 뉴욕주님의교회 목사 내외와 함께 교회를 방문했다.
◇일제시대 유학생 안식처 ‘눈물의 빵’ 나눠=뉴욕한인교회는 1921년 3월 1일 뉴욕 맨해튼 타운홀에서 열린 3·1운동 2주년 기념 한인연합대회에서 창립이 결의됐다. 당시 대회는 서재필이 의장을 맡고 미국 친한회 회원 킴버랜드 여사, 길모어 교수와 정한경 조병옥 등이 준비했다. 참석자 1300여명 중 한인은 100여명에 불과했다. 아시아의 작은 나라 한국에 대한 미국인들의 관심과 애정이 적지 않았음을 짐작케 한다.
이용보 목사의 안내로 1927년 유학생과 교인들이 3만5000달러에 사들여 88년간 사용해온 4층 높이의 교회건물을 둘러봤다. 낡은 나선형 목조계단을 떠받치기 위해 천장까지 지지대를 세워놓았다. 계단을 밟을 때마다 ‘삐걱 삐걱’ 소리가 났다. 이 목사는 “콘크리트 건물은 노후하면 예고 없이 무너져 내리지만 목조 건물은 삐걱거리는 소리로 신호를 보낸다”며 미소를 지었다. 교회 초기 3·4층은 주로 유학생들의 숙소로 사용됐다.
“조병옥 정일형 박사는 교회 창립 멤버, 김활란 박사는 초대 청년부 회장이었고 오천석 박사는 유학생 잡지 ‘우라키(The Rocky)’를 창간했습니다.” 이 목사의 말이 이어졌다. 교회 창립 당시 뉴욕에는 유학생 60명을 포함해 한인이 100여명 있었다. “세계대공황기엔 가난한 교회 청년들이 방 한 가운데 빵 한 조각, 우유 한 병을 놓고 둘러앉아 나눠 먹었다고 해요.”
그들이 머물렀던 곳을 잠시 바라보았다. “유학생들의 수기를 보면 힘들더라도 꼭 공부를 마치고 조국으로 돌아가 독립을 위해, 민족을 위해 헌신하자고 다짐하는 내용들이 많습니다. 신앙이 없었다면 아마 견디기 어려웠겠죠.”
이 목사는 뉴욕한인교회사를 보여줬다. 1925년 창간된 ‘우라키’ 창간호에 따르면 한인 미국 유학생은 300여명이었다. 지역별로는 평남(85명)이 가장 많았고 평북(50명)과 경기도(14명)가 뒤를 이었다.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불렸던 평양을 중심으로 한 평남 출신이 많았던 것이 눈에 띈다. 전공은 의학(70명) 교육(60명) 신학(30명) 상학(30명) 순이었다.
유학생들은 공부를 끝낸 뒤 귀국해 독립운동과 민족교육에 기여했다. 1931년 컬럼비아대에서 한국 여성 최초로 철학박사학위를 받은 김 박사는 이화여전 교장과 이화여대 초대 총장을 역임했다. 그러나 일제 말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활동 등을 한 그에겐 친일 논란이 따른다. 이 목사는 “이화여전 폐교 등 일제의 협박이 컸다는 기록을 본 적이 있다. 안타깝다”고 했다. 이 교회 출신 여성 지도자 박인덕은 인덕실업학교(인덕대 전신)를 설립했다.
조병옥은 유학 후 항일단체 신간회 창립에 참여했고 1950년 내무장관으로 임명됐다. 드루대에서 공부한 정일형은 1960년 6대 외무부장관을 맡았다. 문교부장관을 지낸 오천석은 1987년 숨질 때 “나는 내 조국의 민주교육을 위하여 살고 일하다 가노라”라는 말을 남겼다. 그의 장례는 한국 최초로 교육인장으로 치러졌다.
◇미국 동부 독립운동의 거점, ‘애국가’ 작곡도=뉴욕한인교회는 1963년 브루클린에 한인중앙교회가 설립될 때까지 뉴욕의 유일한 한인교회였다. 일제 시대에는 독립운동의 거점이었다. 서재필 이승만 안창호 등 민족 지도자들이 이 교회에서 연설했고 교인들은 이를 들으며 울분을 토했다. 매년 열린 3·1운동 기념식에는 인근 한인들까지 다 모였다.
‘3·1운동 기념식에(서)는 조국의 비참한 현실과 독립운동에 대한 절규를 내뿜었다. (중략) 주일에도 눈물겨운 목사의 설교와 교인들의 슬픈 기도 때문에 눈물 흘리곤 했다.’ 뉴욕한인교회 장로였던 한승인(1903∼1990)이 남긴 기록이다. 일제강점기 한국교회 목회자들은 출애굽기를 토대로 설교를 자주 했다.
“출애굽기는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다 해방되는 과정을 담고 있잖아요. 억압과 해방의 구조지요. 나라 잃은 우리 민족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서였을 겁니다.”(이 목사)
1929년 이 교회 3대 목사로 부임한 윤병구는 1905년 이승만 전 대통령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당시 미국 대통령과 면담할 때 동행했다. 그는 1903년 하와이에서 첫 한인정치조직인 신민회를 조직했다.
교회 지하로 내려갔다. 이 목사가 진한 갈색 피아노 앞에 섰다. “안익태 선생이 이 피아노로 애국가를 작곡했어요. 저희 교인이었어요.” 피아노의 하얀 건반을 눌렀다. ‘딩동댕동’. 아직 소리가 맑았다. 애국가 작곡발표회가 1942년 이곳에서 열렸다. 1940년대 교회에 출석했던 공병우는 상용화된 최초의 한글 타자기를 발명했다.
교회는 나라 없는 한인들의 ‘영사관’이기도 했다. ‘뉴욕한인교회 선교약사’에는 1936년 부임한 4대 임창령 목사의 회고가 나온다. 그는 “교회 일보다 교포 영사의 일이 더 많았다. 이민국 경찰서 병원은 한인이 관련되면 나에게 제일 먼저 연락했다”고 밝혔다. 1941년 목사직 사임 후 프린스턴대에 입학한 그는 물리학자 아인슈타인 등 미국인 동지들의 도움을 받아 조국 해방을 위해 ‘자유한국위원회’를 조직했다.
이 목사는 “우리 교회에는 이 역사를 기록하고 설명할 의무가 있다. 교회건물이 노후화돼 재건축을 하지만 과거를 기억하기 위해 건물 앞면은 그대로 살릴 계획”이라고 말했다.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버지에게 물으라’(신 32:7)는 70년사 서문의 성구가 떠올랐다. 1945년 8월 15일 일왕이 항복을 선언하고 한국이 해방되던 날, 뉴욕 한인들은 모두 교회로 달려와 얼싸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감사예배를 드리고, 냉면과 떡을 먹으며 잔치를 벌였다.
뉴욕한인교회에서 나온 뒤 윤 목사 내외와 함께 인근 유엔 본부를 찾았다. “반기문 사무총장을 불러보자”는 윤 목사의 말에 다같이 웃었다. 193개 회원국 국기가 광장에 펄럭이고 있었다. 태극기도 어렵지 않게 찾았다.
뉴욕=글·사진 강주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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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 70년을 넘어 평화통일을 향해-(1부)] 조국 위해 눈물의 기도… 유학생 품어 민족지도자 배출했다
입력 2015-07-23 0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