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킹 프로그램 구입·운영 실무를 담당하던 국가정보원 임모(45) 과장이 숨진 채 발견됐다. 그가 남긴 유서에는 민간인 사찰 의혹을 극구 부인하는 내용이 담겼다. 꼬리를 무는 의혹에 국회가 여야 합의로 국정원 현장조사를 실시키로 결정한 뒤여서 파문은 더욱 커질 전망이다.
경기 용인동부경찰서는 19일 “임 과장의 시신을 부검한 결과 일산화탄소 중독에 따른 질식사로 보인다”고 말했다. 경찰은 외부 침입 흔적과 외상이 없는 점으로 미뤄 자살로 추정했다. 유서에는 부모, 아내와 두 딸, 국정원에 보내는 메시지가 각각 담긴 것으로 전해졌다. 유족은 당초 유서 공개를 완강히 거부했지만 당국의 설득이 거듭되자 국정원에 보내는 A4용지 1장 분량의 유서를 언론에 공개했다. 유서에는 “동료와 국민들께 큰 논란이 되게 되어 죄송하다”며 “내국인에 대한, 선거에 대한 사찰은 전혀 없었다”고 적혀 있었다.
임 과장은 국정원에서 20년 동안 사이버 안보 분야를 담당했다고 한다. 2012년 대선 직전 국정원이 이탈리아에서 휴대전화 해킹 프로그램을 구입하는 데 관여했고 이후 프로그램 운용을 맡아 왔다. 경찰은 국정원이 민간인을 사찰했다는 의혹이 불거지자 임 과장이 압박을 느끼고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런 당국의 설명에도 의문은 남는다. 임 과장이 집을 나간 지 5시간 만에 가족은 실종신고를 냈고, 통상적인 실종 사건 수사와는 다르게 소방 당국과 경찰이 즉시 대대적인 수색에 나서서 접수 2시간 만에 시신을 찾아냈다. 소방 당국이 가장 먼저 발견한 점도 선뜻 납득이 가지 않는다. 논란의 핵심이 되고 있는 ‘문제 직원’이 출근하지 않았고 가족들이 실종신고를 하고 수색이 벌어지는 동안에도 국가 최고 정보기관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임 과장은 유서에 “내국인·선거 사찰은 전혀 없었다”며 동료에 대한 미안함을 나타냈다. 자신의 업무가 노출되면서 조직에 누를 끼쳤다는 뉘앙스가 짙다. 그러나 임 과장은 해킹 프로그램 도입·운용의 실무자로 윗선에서 정해진 대상을 감청할 수 있도록 기술적 지원을 하는 역할에 머물렀던 것으로 전해졌다. 임 과장이 과연 극단적인 책임을 져야 할 만한 자리에 있었느냐는 의문이 남는다. 국정원은 관련 법규에 따라 임 과장의 업무 등은 구체적으로 밝힐 수 없다는 입장이다.
임 과장은 의혹이 잇따라 제기되자 압박감에 시달린 듯 자신의 업무 자료를 서버에서 삭제했다. 이후 자체 감찰과 국회 현장조사 준비 과정에서 소명 자료가 삭제된 데 대한 내부 추궁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임 과장은 유서를 통해 “(자료 삭제는) 저의 부족한 판단이 저지른 실수였다”고 말했다.
국정원은 국회에 “삭제된 자료는 100% 복원이 가능하다”고 밝혔다. 임 과장이 이를 몰랐을 리 만무하다. 국정원 측은 “임 과장이 나흘 동안 잠도 못 잔 상태로 일하느라 공황상태에서 착각을 일으킨 것”이라고 추론했지만 이 역시 선뜻 납득하기 어렵다.
용인=김미나 기자 mina@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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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5-07-20 0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