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정색 정장 바지에 하늘색 와이셔츠를 입은 노신사는 식당에 들어서자 진녹색 앞치마부터 둘러맸다. 식탁을 차지한 60여명은 남루한 행색의 노숙인들이었다. 노신사는 밥 육개장 열무김치 등이 담긴 쟁반을 나르다가 열없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여러분이 맛있게 먹어주셔야 제 기분이 좋습니다.”
19일 아침에 찾은 이곳은 서울 마포구 만리재로 한 아파트 단지 상가에 있는 산마루교회(이주연 목사). 노신사는 2013년 2월부터 올 2월까지 대한민국의 ‘국정 2인자’였던 정홍원(71) 전 국무총리였다.
산마루교회는 매주 주일 아침마다 노숙인 무료 배식을 하는 교회다. 정 전 총리는 지난달 7일부터 격주로 이 교회를 방문해 식사비용 일부를 지원하고 배식 봉사를 하며 나눔을 실천하고 있다. 독실한 크리스천인 그는 경기도 성남 할렐루야교회(김승욱 목사)의 안수집사이기도 하다.
그런데 정 전 총리가 산마루교회의 ‘노숙인 사역’에 동참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배식 봉사를 마친 그를 만나 질문을 건네자 정 전 총리는 “내가 하는 일이 전시성 이벤트처럼 보일까봐 걱정”이라면서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그는 “(외부에) 알려지는 게 조심스럽다”고도 했다.
“우리 사회가 얼음장 같잖아요. 이런 사회에 온기가 퍼지길 기대하면서, 내가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데 밀알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한 일입니다. 다른 이유는 하나도 없어요.”
정 전 총리는 지난 5월 지인으로부터 산마루교회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산마루교회는 노숙인 자립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는 곳이다. 이 교회는 주일 오전 7시30분이면 노숙인을 중심으로 예배를 드린다. 서울 북악산 자락과 경기도 포천에 노숙인들이 일구는 농장도 운영하고 있다.
정 전 총리는 “취약 계층을 상대로 무조건 도와주기만 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자립할 수 있도록 근성을 길러주는 게 중요한데 산마루교회는 그런 활동을 하는 곳”이라고 소개했다.
정 전 총리는 산마루교회에 오면 예배를 드리고 배식 봉사를 한 뒤 남은 국과 반찬으로 아침을 해결한다. 이날 역시 노숙인들이 거의 식사를 마치고 나서야 육개장에 밥을 말아 아침을 먹었다. 한 성도는 앞치마를 입은 모습으로 밥을 먹는 그에게 다가와 “(앞치마를 맨 모습이) 이제는 잘 어울리시네요”라며 인사를 건넸다. 정 전 총리는 대답 대신 미소로 화답했다.
밥을 다 먹은 그는 “산마루교회에 처음 왔을 때는 악수를 청해도 거부하는 노숙인들이 많았다”고 했다. 이어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노숙인들 역시 나를 편하게 생각한다”면서 뿌듯해했다.
“저를 대하는 노숙인들 표정이 굉장히 밝아요(웃음). 그런 표정을 볼 때면 큰 보람을 느낍니다. 우리 사회에 봉사 분위기가 확산됐으면 좋겠어요. 봉사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참여율도 높아져야 참된 사랑의 정신이 구현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교회가 좋은 활동을 많이 하고 있지만 좀 더 피부에 와 닿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활동을 했으면 합니다.”
이주연(58) 목사는 “국정 책임자에서 국민의 한 사람으로 돌아온 정 전 총리가 낮은 이들을 섬기며 새로운 삶을 시작한 것은 뜻깊다”면서 “‘노블리스 오블리주’와 ‘언행일치’를 실천하려는 그의 행보가 계속 이어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글·사진=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
정홍원 前 총리의 ‘밥퍼’… 산마루교회 노숙자 주일 무료 배식
입력 2015-07-20 00: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