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母子가 함께 한국선교 문 연 스크랜턴] (16) 혼돈 속 새 질서 모색

입력 2015-07-21 00:19
스크랜턴 대부인은 신참인 구타펠 선교사 등과 함께 1905년 10월 말부터 한 달여간 경기 남부 지역 선교여행을 떠났다. ‘Korea Mission Field(1906)’에 실린 기사와 사진. 가운데 사진은 가마를 타는 스크랜턴 대부인. 오른쪽은 미국 여행단과 함께 방한한 미 루스벨트 대통령의 딸 앨리스. 이덕주 교수 제공

1905년은 스크랜턴 선교사 모자에게는 바쁜 한 해였다. 봄부터 여름까지 일본 선교부의 해리스 감독의 내한과 연회가 개최됐고 원산과 평양 등 지방으로도 선교여행을 떠났다. 가을에 접어들어서는 미국에서 온 귀빈 여행단을 맞아 분주했다. 미국 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맏딸 앨리스 루스벨트(당시 21세)가 50여명의 여행단을 이끌고 방한했던 것이다.



앨리스 루스벨트의 방한과 을사늑약

여행단은 외형상 앨리스 루스벨트의 개인적 여행처럼 보였으나 실상은 정치적 목적을 가진 외교단 일행이었다. 미국 대통령의 신임을 받는 육군 장관 태프트와 하원의원 공화당 원내 대변인 롱워스를 비롯해 하원의원 23명 등 다수 외교관리 등이 포함돼 있었다. 이들은 한국에 도착하기 앞서 일본에서 미·일간 비밀협정인 ‘가쓰라태프트밀약’을 체결했다.

태프트 육군장관이 7월 29일 일본 수상 가쓰라(桂太郞)와 비밀 협약을 맺고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일본이 묵인하는 대신 일본의 한국 지배를 미국이 묵인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런 협약 내용이 1924년 미국 언론에 알려지지 전까지 우리는 전혀 몰랐다. 오히려 한국인들은 미국이 일본의 침략과 지배로부터 한국을 지켜줄 것으로 착각했다.

여행단이 인천에 들어온 것은 9월 19일이었다. 시민들은 대대적으로 환영했다. ‘미국 공주’ 앨리스를 통해 루스벨트 대통령으로 하여금 대한제국에 유리하도록 일본 정부에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해 줄 것을 기대한 것이다.

앨리스 루스벨트는 9월 23일 오후 상동교회에서 한국 기독교인의 환영회에 참석한 후 건너편 달성궁 저택에서 선교사들이 마련한 가든파티에 참석했다. 여기서 선교사들은 가죽제본 한국 찬송가와 신약성경을 선물로 전달했다. 상동교회 미드기념예배당에서는 한국 여학생 대표 4명이 나와 강단 위에 앉아있는 루스벨트 양에게 한국식으로 큰 절을 하기도 했다. 상동교회 환영회가 성사되기까지는 스크랜턴 가족이 중요한 역할을 했음은 물론이다. 스크랜턴이 태프트 장관과 예일대 동기동창이었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스크랜턴이 이를 통해 한국 기독교인들의 교회 사랑과 나라 사랑을 보여주고 싶었을 테지만 과연 얼마나 영향을 끼쳤는지는 알 수 없다. 오히려 이후 미국 정부의 대일관계는 더욱 공고해져서 가쓰라태프트밀약을 지지했을 뿐 아니라 1931년 중·일전쟁이 터질 때까지 동맹관계를 유지했다. 한국인의 미국에 대한 기대는 ‘짝사랑’이었다.

가쓰라태프트밀약 이후 역사는 우리가 아는 바와 같다. 그해 11월 9일 일본 추밀원 의장 이토오가 내한해 고종황제를 협박, 한·일 신조약 체결을 요구했다. 조약의 핵심은 외교권을 일본 정부에 넘겨주고 통감부를 설치, 대한제국의 정치와 외교를 지휘, 관리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고종이 응하지 않자 이토오는 일본공사 하야시와 일본군 사령관을 동원, 한국 정부 각료들을 겁박하고 조약체결을 반대하는 고종과 대신을 배제시킨 채 11월 17일 정동의 경운궁(덕구궁) 중명전에서 ‘한일협상조약(을사조약)’을 체결했다. 강요와 협박으로 이루어진 강제 조약이라는 점에서 늑약이었다.



외국인 선교사로서의 고민

이런 상황에서 당시 기독교계는 두 가지 반응을 보였다. 정교분리 원칙을 내세우며 침묵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고 일제 지배를 ‘하나님의 뜻’으로 해석하고 순응하는 기독교인들도 많았다. 그러나 일제 침략을 거부하고 항일민족운동을 전개하는 기독교인들도 적지 않았다.

이런 기독교 민족저항운동의 중심에 상동청년회가 있었다. 이승만과 김구 등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모여 있었다. 역사가들은 이들을 ‘상동파’라 불렀다. 상동파는 구국기도회부터 무장테러운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항일 민족운동을 전개했고 도산 안창호를 중심한 서북지역 민족운동 세력들과 연대해 항일비밀결사인 ‘신민회’ 조직에 참여했다.

상동파 민족운동은 모두 상동교회 부속 기관과 단체에서 비롯됐다는 점에서 상동교회를 실질적으로 담임하던 전덕기 목사의 역할이 결정적 기반이 됐다. 전 목사는 남대문시장 숯장수 집안 출신으로 스크랜턴의 요리사로 들어와 어엿한 목사가 되어 교회 지도자 반열에 올랐다. 그의 지도력은 교회 안뿐 아니라 교회 밖에서도 인정받았다. 민족주의자들에게 전 목사가 이끄는 상동교회 청년회는 민족운동의 구심점이 되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상동교회 담임이자 한국교회 총리사로서 스크랜턴의 고민이 시작됐다. 그는 청년회 활동이 정치적인 것으로 바뀌고 있다고 판단했다. 청년회원들 가운데 친일 매국노를 척결하려는 무장 운동을 모의하자 그는 집회를 금지했다. 또 상동청년학원 야학교 수업까지 중단시켰다. 한·일 양국 사이에서 선교부와 교회는 엄정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 스크랜턴의 일관된 자세였다.

청년회는 굴하지 않았다. 상동청년회원들의 ‘을사 5적 척결운동’은 한말 기독교인들이 전개한 민족운동 중 가장 급진적인 운동으로 기록됐다. 이들은 특히 연합구국기도회와 ‘도끼상소’ 운동을 전개시켰다. 이렇게 되자 일본 경찰이 상동청년회를 주시하게 됐고 감시와 탄압을 지속했다. 결국 스크랜턴은 특단의 대책으로 청년회 해산 명령을 내렸다. 1905∼1906년 겨울은 한민족뿐 아니라 스크랜턴에게도 춥고 우울한 계절이었다.

이런 가운데 메리 스크랜턴 대부인은 ‘은퇴 정년’ 3년을 넘긴 73세에 선교 사역을 재개했다. 서울 상동교회와 전도부인 신학교육, 그리고 경기 남부지역 선교사역을 감당했다. 내한 2년차였던 손녀뻘 되는 구타펠 선교사와 선교여행을 시도했다. 1905년 10월 25일 서울을 출발해 32일간 총 143마일(228.8㎞)을 여행했다. 경기도 광주와 이천 여주 지방 16개 도시와 마을에서 총 91차 집회를 인도했다.

당시 순회전도여행단은 구타펠과 상동교회 전도부인, 가마꾼, 생활도우미 등 15명으로 구성됐는데 시골사람들에겐 보기 드문 볼거리였다고 한다. 기독교를 반대하던 지역 터줏대감이 칠십이 넘은 노부인의 전도 모습을 보면서 “죽음까지 불사하며 전하는 것을 보면 생명을 걸만한 가치가 있는 도인가 보다” 하고 믿기로 결심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이덕주 교수(감신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