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술한 ‘증거법’에 울고 웃은 국정원… 대법 댓글 사건 파기 환송 안팎

입력 2015-07-18 02:31
1961년 개정 이후 한번도 바뀐 적 없는 ‘증거법’의 허점이 16일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에 대한 대법원 판결에서 다시 확인됐다. 이 법은 디지털 자료의 증거능력을 너무 까다롭게 규정한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증거법의 높은 문턱 때문에 공안사범 수사에서 곤경에 처하곤 했던 국정원은 이번 대선개입 사건에선 거꾸로 이 법의 덕을 톡톡히 봤다. 국정원 직원 이메일에서 나온 대선개입 관련 정보들은 끝내 증거로 인정되지 않았다.

국정원 심리전단 김모씨 이메일에서 발견된 ‘425지논’과 ‘씨큐리티’ 파일은 1심부터 핵심 쟁점이 됐던 부분이다. 두 파일에는 심리전단의 사이버 활동에 필요한 트위터 계정과 비밀번호, 정부를 옹호하고 야권을 비판하는 내용의 논지 등이 담겨 있었다.

김씨는 이 파일들을 ‘내게 쓴 메일함’에 보관해 뒀다. 파일들은 주기적으로 업데이트가 됐다. 각 트위터 계정 앞에 국정원 심리전단 안보5팀 직원 22명의 이름 앞 두 글자가 기재돼 있었고, 김씨의 업무상 활동이 적시된 부분도 있다. 김씨가 심리전단 업무 차원에서 직접 작성한 문서로 추론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김씨는 법정에서 “내가 작성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는 모르쇠 전략으로 일관했다. 법조계에서는 현 증거법의 허점을 파고든 것으로 분석한다. 50여년 전 개정된 형사소송법 조항은 ‘전문(傳聞)증거’의 경우 작성자가 재판에서 작성 사실을 인정한 문서만을 증거로 쓸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컴퓨터가 일반화되기 전에 만들어진 이 조항은 지금의 디지털 문서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국정원의 전략은 실제 적중했다. 1심 재판부는 두 파일을 증거에서 아예 배제했다. 2심 재판부는 ‘업무상 문서’라는 예외 조항을 적용해 증거능력을 인정했지만 이는 다시 대법원에서 뒤집혔다.

대법관 13명은 이번 판결에서 “1961년 개정된 형사소송법 313조 1항의 규정은 21세기 정보화 시대에 맞게 해석해야 한다는 견해는 나름 경청할 만한 가치가 있다”며 증거법의 ‘구시대성’을 인정했다. 작성자로 지목된 자의 진술과는 관계없이 해당 디지털 문서와 관련된 주변 정황으로 작성자를 확인할 수 있다는 견해도 소개했다. 그러면서도 대법원은 “입법을 통한 해결은 몰라도 (법적) 해석을 통해 실정법 조항을 확장 적용할 수는 없다”며 국회에 책임을 돌렸다.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을 우선해야 한다’는 형사법의 대원칙을 내세웠다.

증거법은 역설적이게도 그동안 국정원의 국가보안법 위반 사범 수사에서 장애물로 작용해 왔다. 2000년대 대표적 공안사건인 ‘일심회’ ‘왕재산’ 사건 재판에서도 디지털 매체에 저장된 핵심 문건들의 증거능력이 인정되지 않았다. 간첩사건에서 종종 등장하는 북한지령 문건의 경우 북한에 있는 작성자를 아예 우리 법정에 세우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검찰은 디지털 정보의 증거능력 인정 기준을 시대에 맞게 수정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지난해 11월 서울중앙지검의 공안부 검사들을 중심으로 ‘증거법 연구회’가 조직됐다. 연구회의 보고서는 올 초 대검찰청 공안부를 거쳐 법무부로 넘어갔다. 법무부는 ‘형사소송법 개정을 위한 태스크포스’를 꾸려 법개정 검토에 착수했다. 학계에서는 파일에 입력된 암호, 디지털 문건의 외양이나 내용, 문건에서 반복되는 독특한 패턴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해 작성자를 확인하는 방안 등이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다.

정현수 기자 jukebox@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