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은 국가정보원 심리전단 직원의 이메일에서 나온 텍스트 파일 2개를 문제 삼았다. 두 파일은 항소심 재판부가 국정원의 대선 개입을 유죄로 판단한 주요 근거의 시발점이었다. 대법원은 이 파일들을 증거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선거개입 판단은 유보해 파기환송심을 맡을 서울고법에 공을 떠넘겼다. 검찰과 원세훈 전 국정원장은 남은 증거를 놓고 법정공방을 이어가게 됐다.
◇국정원 직원 메일함서 나왔는데…“업무에 쓰였는지 모르겠다”=대법원이 증거로 인정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은 ‘425지논’과 ‘시큐리티’라는 이름의 텍스트 파일이다. 425지논 파일에는 정부 정책을 옹호하고, 야권의 반대 주장을 반박하는 정치 논지가 정리돼 있다. 시큐리티 파일에는 심리전단이 사용한 트위터 계정과 비밀번호, 활동 내용 등이 담겼다. 검찰은 국정원 심리전단 직원 김모씨의 이메일 계정에서 발견된 이 파일들을 단초 삼아 정치·대선 개입 트위터 글 등을 찾아냈다.
문제는 이 파일들을 자신이 작성했다고 검찰에 시인했던 김씨가 진술을 번복하면서 불거졌다. ‘내게 쓴 메일함’에서 발견된 이 파일들에 대해 김씨는 법정에서 “작성한 기억이 없다”고 했다. 형사소송법상 작성자가 작성 사실을 인정하지 않은 디지털 문서는 증거로 쓰일 수 없다. 때문에 1심 재판부는 이 파일에 기초한 트위터 글을 증거에서 배제했다. 검찰이 제시한 1157개 트위터 계정 중 175개만 인정됐다.
항소심 재판부는 형사소송법 315조에서 돌파구를 찾았다. ‘업무상 필요로 작성한 통상의 문서’는 당연히 증거능력을 가진다는 규정이다. 두 파일을 김씨가 업무를 위해 작성한 문서로 판단하면서 증거능력을 부여했다. 증거로 인정된 트위터 계정은 716개로 늘었고, 정치·선거 개입 트위터 글도 11만여건(1심)에서 27만여건으로 증가했다. 재판부는 이를 근거로 원 전 원장에게 공직선거법 위반죄를 적용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이 파일들을 업무상 문서로 볼 수 없다며 항소심 판단을 뒤집었다. 트위터 계정과 논지가 두 파일에 기재된 경위가 분명치 않다는 이유다. 또 업무 수행 과정에서 실제 어떻게 활용됐는지도 알 수 없다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다른 심리전단 직원들의 이메일 계정에서는 같은 형태의 문서가 발견되지 않았다”며 심리전단 업무활동을 위한 관행적·통상적 문서로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대선 개입 판단은 다시 서울고법으로=대법원이 ‘업무상 문서’의 의미를 좁게 해석하면서 항소심에서 인정된 증거 대부분은 쓰일 수 없게 됐다. 검찰과 원 전 원장은 1심 재판에서 인정된 일부 증거를 중심으로 대선 개입 여부를 다툴 것으로 보인다. 대선 기간에 작성된 트윗·리트윗 글 상당수가 증거로 인정받을 수 없게 된 만큼 국정원이 대선에 적극 개입했다는 ‘경향성’을 설명하기가 더 어려워졌다. 원 전 원장의 선거법 위반 혐의에 무죄가 나올 가능성이 커진 셈이다.
그러나 대선 개입이 인정되지 않으리라 단정하긴 이르다. 예를 들어 1심 재판부가 인정한 증거 중에는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는 천안함 폭침 후 나온 5·24 대북제재 조치까지 해제하겠다고 한다. 어떤 후보가 안보와 국익을 책임질 수 있는지 눈여겨봐야…’처럼 대선 후보에 대한 글도 상당수 포함돼 있다.
앞서 항소심 재판부는 심리전단의 행위를 적극적으로 해석했다. 재판부는 “선거기간에는 야당 입장을 비난하는 행위조차도 선거운동으로 볼 강한 정황이 된다”고 판시했다. 때문에 파기환송심을 맡을 재판부가 글의 성격을 어떻게 판단하느냐에 따라서 국정원의 대선개입이 인정될 가능성도 있다. 선거개입 혐의에 무죄를 선고한 1심 재판부도 “심리전단 직원들이 선거운동을 한 건 아닌지 의심이 드는 것은 사실”이라고 밝히기도 했었다.
대법원은 이와 관련해 아무런 판단을 내리지 않았다. 재판부는 “법률심인 대법원은 사실관계 판단을 할 수 없다”며 “심리전단 활동이 선거운동이나 정치 관여에 해당하는지는 원심이 다시 심리·판단해야 한다”고 밝혔다.
정현수 기자 jukebox@kmib.co.kr
[원세훈 선거법 위반 파기환송] “항소심이 인정한 텍스트 파일 2개 증거능력 없다”
입력 2015-07-17 02: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