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정 마가복음 성경번역 130주년 일본 기독교 유적 답사] 십자가 동경한 순결한 영혼

입력 2015-07-18 00:41
최근 일본 기독교 유적 답사팀이 찾은 일본 교토 도시샤대학 교정의 윤동주 ‘서시’ 시비. 시비 앞에는 추모객들이 남긴 필기도구와 음료 등이 놓여있다.
일본 기독교 유적 답사팀이 가이간교회 앞에서 함께했다.
일본 도시샤대학 클라크 기념관.
시비(詩碑)는 크지 않았다. 가로 1.2m, 세로 1m. 회색 대리석 바탕의 검은 돌 위엔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가까이 다가서 보니 한글과 일어였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르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 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거러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1941. 11. 20)



윤동주(1917∼1945)의 대표작 ‘서시’였다. 시인의 자필 글씨였다. 연약해 보였다. 그리고 쓸쓸했다. 그는 자신에게 닥칠 운명을 미리 알았던 것일까. 서시 마지막 줄의 글자 ‘바람’은 약간 흔들려 있었다. ‘이수정 마가복음 출판 130주년 일본 기독교 유적’ 답사팀이 최근 방문한 곳은 천년 고도 교토(京都)시 카미쿄구에 위치한 도시샤(同志社)대학이었다.



윤동주와 정지용의 민족혼, 시심을 만나다

답사팀이 마주한 시비 앞에는 누군가 다녀간 흔적이 수북했다. 우산과 필기도구, 물, 음료수, 꽃 한송이, 그리고 작은 십자가를 얹은 빛바랜 사진 액자 등이 놓여 있었다. 사진 액자는 윤동주 시인의 고향산천과 집을 그려놓은 북간도 화룡현 명동촌 풍경이었다.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이덕주(감신대) 소장은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을 시작했다.

“바쳐진 헌물을 보십시오. 볼펜과 연필이 쌓여 있군요. 이제는 마음껏 쓰시라고 표현한 걸까요. 윤동주가 살았던 마을 주민들은 독립운동가 이동휘로부터 기독교를 소개받았습니다. 주민들이 살았던 집의 기와는 모두 십자가가 새겨져 있습니다. 윤동주는 아마도 그런 문화 속에 살았을 겁니다. 그의 시에 십자가가 많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이수정은 조국 근대화의 꿈을, 윤동주는 잃어버린 조국을 찾으려는 꿈을 가지고 일본에 왔습니다. 여러분의 꿈은 무엇입니까.”

37명의 답사팀은 이 소장의 말에 귀 기울이며 시비를 응시했다. 조용한 묵상의 시간이 흘렀고 방문자들은 시비 앞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가 쓰다듬거나 ‘서시’를 찬찬히 읽었다. 시비는 해리스 이화학관과 도시샤 예배당 사이에 세워져 있었다. 윤동주 시비 오른쪽으로 10m쯤 옆에는 또 하나의 시비가 있었다. 정지용이었다. 정지용 시비에는 시 ‘압천(鴨川)’이 새겨져 있었다. 대표작 ‘향수’에 등장하는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을 떠올리며 고향 강줄기를 모티브로 썼던 시다. 답사팀은 한국 현대 시문학을 대표하는 두 시인의 영혼과 시심(詩心)을 도시샤대 캠퍼스 한가운데서 만났다.

윤동주는 1942년 도쿄의 릿코대로 유학 왔다가 당시 도시샤대를 다녔던 정지용 시인을 흠모해 그해 10월 1일 도시샤대 영문과로 편입했다. 시인은 이 학교에서 한 학기를 더 공부하고 이듬해인 1943년 귀향길에 오르려다 교토대 친구인 송몽규와 함께 체포돼 45년 2월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짧은 인생을 마감했다. 시비는 1995년 도시샤교우회 코리아클럽의 발의로 윤동주 50주기에 세워졌다.



관서지방 신학의 요람

도시샤대는 1875년 일본 초기 기독교인 니지마 조(新島襄)가 중심이 되어 야마모토 가쿠마(山本覺馬)와 미국인 제롬 데이비스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창립한 도시샤 영학교가 그 전신이다. 특이한 것은 대학 캠퍼스 절반이 쇼코쿠지(相國寺)라는 사찰 내부에 있다는 것이다. 특히 도시샤대와 도시샤여대 사이 도로 건너편에는 쇼코쿠지의 드넓은 정원이 펼쳐지는데 그곳 경내에서 바라본 도시샤대의 풍경은 이색적이다. 천년 고찰에 유럽풍 학교 건물들이 보이고 그 너머로는 일본 신도(神道)의 수장이라 할 수 있는 천황의 옛 거처, 고쇼(御所) 후문과 그 경내도 엿볼 수 있다.

답사팀 안내를 맡은 홍이표 일본 선교사는 “이곳은 불교와 신도라는 거대한 두 지배종교 사이에 끼어 힘겹게 자신의 존립을 지켜나갔던 일본 기독교의 ‘실존’을 경험하기에 안성맞춤인 공간”이라며 “선교사들이 고도 교토에서 서양식을 고집하지 않고 토착문화에 적응하며 선교를 시작한 결과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일본 관동 지역에 도쿄신학교가 있다면 관서엔 도시샤대 신학부를 꼽는다. 그만큼 도시샤대는 일본 기독교의 근간을 이루는 곳이기도 하다. 도시샤대는 최근 우익 군국주의 부활을 꿈꾸는 일본 정부를 향해 곧은 소리를 외치는 양심으로 떠오르며 그 사명을 다하고 있다.

일본 기독교는 흔히 3개의 밴드로 구분한다. 첫째, 서구 선교사들이 밀집했던 요코하마 지역을 중심으로 서구문물과 기독교를 접촉했던 ‘요코하마 밴드’다. 둘째, 규슈(九州)의 구마모토(態本)에 양학교를 세우고 미국인 평신도 교사 제인을 중심으로 형성된 ‘구마모토 밴드’다. 이들은 제인 선교사 귀국 후 양학교 유지가 어려워지자 도시샤대로 그 근거를 이전했다. 셋째는 홋카이도(北海道)의 삿포로(札幌) 농학교를 중심으로 하는 그룹이다. 미국인 교사 클라크가 초빙됐는데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그의 영향을 받은 농학교 수재들이 기독교 신앙 그룹을 형성했는데 이를 ‘삿포로 밴드’로 부른다. 우치무라 간조를 필두로 하는 무교회주의 계열이 여기에 해당한다.



일본 개신교 최초의 교회

답사팀은 하루 앞서 일본 최초의 개신교회인 가이간(海岸)교회를 방문했다. 1868년 돌로 만든 작은 예배당으로 시작됐다. 미국 북장로교회 의료 선교사 햅번(JC Hapburn)을 비롯해 미국성공회 윌리엄스, 미국 개혁교회 브라운, 벌벡크 등이 차례로 도착해 사역하다 교회를 세웠다. 요코하마시 나카구 니혼오도리 8번지로, 야마시타공원에서 요코하마항 쪽으로 걸어 내려오다 만나는 개항기념광장 바로 앞에 있다. 교회 이름을 ‘해안’으로 정한 이유는 마음만 먹으면 단번에 파도치는 바다로 달려갈 수 있다고 해서였다고 한다.

이 교회 담임 우에야마 슈헤이(上山修平) 목사는 이날 “대부분 외국인들은 여기서 예배를 드렸다. 이수정과 언더우드, 아펜젤러도 예배를 드렸을 것”이라며 “2차 세계대전 중 기독교가 탄압받았지만 한 번도 빠짐없이 주일을 지켰다”고 말했다. 이 교회 예배당 내부에도 십자가가 없었다. 개혁교회의 전통이 살아 있었다. 다만 예배당 전면부 양쪽에 성공회식 양식이 설치돼 있어 초기 설립자들의 교파적 성향이 반영돼 있었다. 우에야마 목사는 소개 말미에 “일본 기독교인들은 ‘죄 짐 맡은 우리 구주’ 찬송을 좋아한다. 함께 부르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이에 답사팀은 큰 소리로 찬송을 불렀다.

일본 최초 선교사였던 햅번의 경우 교회를 세우기 전까지 인근 사찰에 머물며 선교의 때를 기다렸다는데 이 점도 흥미롭다. 당시 일본은 선교사 입국은 가능했으나 선교활동은 엄격히 금지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초기 선교사들은 거처를 정해놓고 때를 기다렸다. 햅번 등은 성불사와 종흥사에 거주하면서 ‘영일사전’ 편찬과 의료선교 활동을 펼쳤다. 종흥사에는 햅번 선교사의 시료소 기념비가 설치돼 있다.

교토·요코하마=글 ·사진 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