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친 영화판에서 여성 제작자가 20년을 버틴다는 건 분명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 곳에서 ‘장기 생존’한 명필름 심재명(52) 공동대표를 만났는데, 그녀 스스로 “잘 버텨 왔다”며 대견해했다. 지난 13일 경기도 파주 명필름아트센터에서 점심까지 겸해 1시간30분간 이어진 인터뷰에서 심 대표는 한국영화가 처한 현실과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속내를 풀어놨다.
-명필름이 만들어지고 강산이 두 번 변했다.
“한국영화계는 세대교체가 워낙 빨라 20년 영화 일을 한 사람이 드물다. 시간의 역사성을 부여하기보다는 잘 버티고 유지해 왔구나 생각한다.”
-그간 많이 힘들었나보다.
“미국과 일본에서 20년은 아무것도 아니다. 하지만 우리 영화계는 변화가 빠르고 드라마틱하다. 할리우드는 80∼90세도 성과를 내는 감독과 제작자가 있다. 우리나라는 임권택(79) 감독 외에는 별로 없다. 30, 40대 중심의 제작 환경에서 한국영화계가 조로한다고나 할까. 70대의 조지 밀러 감독은 30여년 만에 ‘매드맥스’를 만들지 않았나.”
-왜 우리나라는 그렇게 가지 않을까.
“문화적 차이가 있겠지만 세대 간 단절이 문제다. 다만 한국영화계가 역동적이라는 긍정적인 점도 있다.”
-영화사를 만든 계기는.
“어릴 적부터 영화를 좋아했다. 82학번인데 당시 여자가 영화 일을 하는 게 흔치는 않았다. 전공도 다르다. 대학 졸업 후 밑바닥부터 차근차근 배우면서 제작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어느 날 갑자기 명필름이 탄생한 게 아니라 오랫동안 꿈꾸며 하나하나씩 계단을 밟아왔다.”
-첫 작품이 ‘코르셋’이었다.
“자체 개발 작품이 잘 풀리지 않았는데 1995년 대종상영화제에서 시나리오 부문 신인상 수상작 ‘코르셋’을 만나게 됐다. 뚱뚱한 여자의 자아발견 과정을 무겁지 않게 담은 게 마음에 들었다. 소재와 주제가 여성의 삶에 관심을 둔 명필름의 지향점과 잘 맞아떨어졌다.”
-성공했나.
“수익을 내지는 못했지만 청룡상 신인배우상과 각본상을 받았다. 주변 평가도 좋았다. 실패한 건 아니다.”
-가장 어려웠던 때는 언제인가.
“초반에 경력이 일천하고 담보 능력이 없어 개인 빚으로 영화를 만들었다. 하지만 크게 보면 시대적 운이 좋았다.
-‘접속’ ‘공동경비구역 JSA’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마당을 나온 암탉’ ‘건축학개론’ 등 36편 중 대표작을 꼽으면.
“하나같이 다 소중하지만 ‘공동경비구역 JSA’는 각별하다. 명필름의 오늘이 있게 하고 박찬욱 감독의 흥행작이기 때문이다. 2000년 150개 극장에서 600만명을 모았으니 지금으로 치면 1000만 영화인 셈이다. ‘우생순’과 ‘건축학개론’도 빼놓을 수 없다.”
-JSA 출연진이 송강호 이병헌 이영애 신하균 김태우였다.
“정말 환상의 캐스팅이었다. 그때도 스타였지만 지금은 한꺼번에 다 같이 모으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스타 배우들이 됐다.”
-다양한 작품을 만들었는데 명필름만의 색깔은 없나.
“액션이 거의 없다, 건달이나 깡패가 나오는 영화도 없다. 판타지도 마찬가지다. 이 분야는 잘 몰라서 그렇게 됐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휴먼 드라마와 멜로 영화를 많이 했다. 안 해본 것도 하고 싶다.”
-손해 본 작품은 없었나.
“수익률이 마이너스 90%도 있다. 내놓는 작품마다 성공한다면 미다스의 손일 텐데 전체 수익률은 30% 정도다. 이 정도 내는 것도 쉽지는 않다.”
-임권택 감독의 ‘화장’은 보고 싶어도 상영관이 없어 못 봤다는 사람이 많았다.
“작품 자체가 예술영화 포지션이어서 한계는 있다. 하지만 10개 스크린 중 되는 영화만 9개에 몰아주는 독과점과 시장을 왜곡하는 부익부 빈익빈이 문제다. 형평성은 영화계의 건강한 생태계를 위해 절실하다.”
-독과점을 법으로 강제해야 한다고 보나.
“자본주의 시장에서 독과점은 해결해야 한다. 강제성을 띤 정책이 필요하다.”
-1000만 영화에 대한 욕심은 없나.
“흥행은 욕심낸다고 되는 게 아니다. 시대적인 운과 작품 완성도, 관객 지지가 있어야 가능하다. 대중에게 인상적이고 좋은 영화 만드는 게 바람이다. 그러다 보면 1000만 영화도 나오지 않을까.”
-최근에 본 영화는.
“‘매드맥스’와 ‘마돈나’를 봤다. 최근에는 자극을 받을 만큼 좋았던 한국영화는 없었다. ‘매드맥스’는 참 잘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영화를 통해 어떤 메시지를 전하려 하나.
“작품마다 다 다르다. 삶을 돌아보며 생각을 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들려고 한다. 2시간 즐겁게 소비하는 오락물로서 엔터테인먼트도 의미가 있다.”
-상당히 진보적이라는 평가를 듣는다.
“한국영화계는 리버럴하고 진보적 성향의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다, 영화 자체가 젊은 매체여서 그렇다. 할리우드는 공화당 내지 민주당을 지지하며 색깔을 드러내는 게 자연스러운데 우리나라는 정치적 프레임 잣대가 편향적이다.”
-파주에 아트센터를 짓고 영화학교도 운영 중이다.
“아트센터는 관객들이 즐길 수 있는 극장, 공연장과 영화학교로 이뤄졌다. 영화학교는 학생 10명을 뽑아 무상 기숙학교에서 영화를 가르치는 아카데미다.”
-뮤지컬도 제작한다고 들었다.
“공연장을 채울 콘텐츠를 고민하다 ‘와이키키 브라더스’를 뮤지컬로 만들기로 했다. 8월 말 공연 예정으로 신인 배우로만 캐스팅했다.”
-20주년 행사는 뭐가 있나.
“7월 24일부터 9월 16일까지 ‘명필름 전작전: 스무 살의 기억’을 연다. 36편 영화를 상영하고 송강호 문소리 박원상 등 배우들이 관객과 대화를 갖는다. ‘건축학개론’의 이제훈과 수지도 개봉 때 하지 못했던 얘기를 한다. 김지운 등 16명 감독과 평론가들도 관객과 만날 예정이다.”
-심 대표의 앞으로 20년은 어떨까.
“20년을 더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명필름은 4기로 구분할 수 있다. ‘코르셋’부터 ‘JSA’까지가 1기이고, 강제규 감독과의 합작시대가 2기, 다시 독립해 ‘우생순’부터 ‘건축학개론’이 3기다. 4기는 파주시대를 연 것이다. 미래의 영화인을 발굴·육성하고 상영·전시·공연 공간을 만들어 새로운 모험을 시도하는 시기여서 긴장과 걱정이 많이 된다. 또 제작산업의 문제를 풀어가면서 공존·공생하는 역할도 해내야 한다. 건강한 한국 영화산업 발전을 위해 해야 할 일이 많다.”
한민수 문화체육부장 mshan@kmib.co.kr
[데스크 직격 인터뷰-심재명 명필름 공동대표] ‘공동경비구역 JSA’ 가장 각별, 미래의 영화인 키우렵니다
입력 2015-07-18 02: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