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하필 내게?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긴 거지?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분노와 우울, 원망과 절망 사이를 오갔다. 암 진단 후 치료 과정이 트라우마를 겪는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 예측하지 못했지만 갑자기 찾아온다. 꼼짝 못하고 당할 수밖에 없다는 무력감에 압도당한다. 이러다 죽겠구나 하는 공포를 경험한다.’
암 진단 후 2년째 투병 중인 정신과 의사가 한 잡지에 ‘암은 인생의 끝이 아니다’란 제목으로 기고한 글의 일부다.
어느 날 암에 걸렸다는 말을 의사로부터 들었을 때 대부분 환자가 보이는 첫 반응이다. 5년 생존율이 90% 이상인 조기 위암의 경우엔 낫다. 의학의 발달로 수술 후 건강을 회복해 천수를 누리는 데 큰 어려움이 없다.
그러나 암 진단 자체가 사형선고와 다름없는 전이(轉移)암 환자의 고통과 좌절감은 가늠할 수 없다. 꽤 진행된 것도 힘든데 암이 어디서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고, 경로조차 불투명할 때 환자가 느끼는 당혹감은 헤아리기조차 힘들다.
원발부위 불명암(Cancer of Unknown Primary Site)을 뜻하는 컵스(CUPS) 환자는 예외 없이 이런 고통과 좌절감, 불안과 우울, 곤혹스러움을 겪는다.
원발부위란 암이 처음 생긴 곳을 말한다. 암은 대부분 어느 부위에 생겼는지가 뚜렷하다. 그래서 위암, 폐암, 유방암같이 먼저 생긴 부위의 이름을 붙인다.
문제는 원발부위가 분명히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있다는 데 있다. 우연히 발견된 암이 그곳에서 처음 생긴 게 아니라 다른 데서 이사온 전이암일 때다. 전이는 대개 암이 해당 장기의 벽을 뚫고 나가 인접 장기를 침범하거나 혈관, 림프관을 따라 다른 장기로 옮겨붙는 형태다. 원발부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생기는 원격전이일지라도 본래의 특질을 유지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컵스는 암 전이의 일반 원칙이 무시된다. 원발부위가 너무 작아 눈에 띄지 않거나 세포 서식 환경이 좋지 않아 전이가 진행된 후 자연 도태됐기 때문이다. 눈에 띄지 않는 전이암은 조직 검사를 해도 특질을 확인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이것이 바로 컵스다.
컵스는 생각보다 많다. 발생 빈도는 전체 암의 약 2∼6%다. 우리나라는 2012년 기준 전체 암의 4.6% 내외다. 연세암병원 종양내과 신상준 교수는 “스위스 미국 핀란드보다는 높고 네덜란드 호주와 비슷한 수준”이라고 말했다.
컵스가 늘어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고령인구 증가에 잘못된 생활습관과 과도한 스트레스 등 환경요인 70%, 유전적 요인 5% 정도로 추정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암의 증가 요인과 다르지 않다.
중앙대학교병원 혈액종양내과 김희준 교수는 “해마다 종합건강검진을 받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암을 우연히 발견하는 것처럼 컵스가 발견되는 비율도 높아지고 있다”고 풀이했다. 이어 “단순히 소화가 안 되거나 목 림프절이 부어 병원에 왔다가 컵스라는 진단을 받고 원발부위를 찾아야 하는 환자도 종종 발견된다”고 덧붙였다.
컵스는 항암제 위주의 항암화학요법으로 치료하고, 경우에 따라 수술과 방사선 치료를 병행한다. 시스플라틴 에토포사이드, 젬시타빈, 도세탁셀, 이리노테칸 등 플라틴계 및 탁신계 항암제가 주로 사용된다.
치료 효과는 종잡을 수 없다. ‘약 궁합’이 맞으면 6∼8회 투약으로 드라마틱하게 씻은 듯 종적을 감춘다. 하지만 효과가 없을 경우 두어 달 뒤 곧바로 재발, 이전보다 더 많이, 더 새카맣게 올라온다. 컵스의 치료율이 낮고 생존율도 떨어지는 이유다. 보고에 따르면 컵스 진단 환자의 약 27%가 평균 2년간 생존했고, 나머지 환자는 보통 6∼9개월 만에 사망했다.
신 교수는 “원발부위 불명암이라면 검사를 제대로 안 한 탓으로 여겨 환자나 보호자들이 다른 병원에서 재검사를 받는 등 같은 검사를 중복하는 경우가 많다”며 “좀 더 컵스를 이해하고 냉정하게 대처할 필요가 있다”고 당부했다. 김 교수도 “불확실한 원발부위를 찾기 위해 병원 쇼핑으로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기보다 원발부위 불명, 그 자체로 치료를 시작하는 것이 낫다”고 조언했다.
이기수 의학전문기자 kslee@kmib.co.kr
[컵스는 어떤 암인가] 본적 없는 ‘떠돌이 癌’ 치료 방법·효과 ‘막막’
입력 2015-07-18 02:46 수정 2015-07-18 17: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