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풍향계-윤덕민] 강제 징용과 한·일관계

입력 2015-07-16 00:24

규슈의 한 탄광 갱벽에는 ‘배가 고파요’ ‘어머니 보고 싶어’ ‘고향에 가고 싶다’라고 한글로 새긴 글씨가 있다. 강제 징용으로 끌려온 조선인 노동자들의 절규다. 70여년 전 50도가 넘는 찜통 같은 지하 갱도의 가혹한 노동조건에서 주먹밥 하나로 기계처럼 하루 14시간 이상의 중노동을 견디며 고향 땅과 어머니를 그리는 그들의 뼈저린 심정을 과연 오늘을 사는 우리들은 얼마나 공감할 수 있을까.

일본 제국주의는 전쟁의 수렁에서 국민 총동원이라는 미명 아래 수많은 조선 청년들을 전장으로 탄광으로 광산으로 군수공장으로 그리고 남태평양의 고도로 끌고 가 강제로 노역을 시켰다. 그들이 끌려간 곳마다 방치되다시피 한 무명의 조선노무자 묘역들이 있다. 대부분 가혹한 노동조건과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고 탈출하다 죽임을 당한 자들의 묘역이다. 더욱이 남태평양의 고도에서 일본군의 옥쇄로 사실상 집단 학살당한 수많은 한국 청년들이 있었다.

강제노역에 대한 우리의 아픈 기억은 여전히 진행형이지만, 이를 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일본은 ‘명치일본의 산업혁명 유산’으로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 등록을 시도하면서 우리 국민들의 강제노역의 애환이 서린 7곳을 포함시켰다. 그런데 일본은 유산의 대상 기간을 1850년부터 1910년까지로 해 조선인 강제징용 문제를 회피하려 했다. 물론 아시아 근대화의 모델이 되었던 명치일본의 발전을 자랑으로 여기고 싶은 나머지 문화유산 등록에 있어서 밝은 빛은 부각시키고 부정적인 그림자는 숨기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거의 모든 인류문화유산은 빛과 그림자가 동시에 있다. 피라미드나 타지마할도 수많은 노예들의 희생이라는 어두운 역사가 있다. 있는 그대로의 역사로 기억하는 것이 인류문화유산의 참된 모습이다.

있는 그대로의 역사를 기록해야 한다는 우리의 입장과 1910년 이전으로 한정해 유네스코 문화유산의 등록을 강행하려는 일본의 입장이 충돌해 수교 50주년에 즈음하여 모처럼 조성됐던 한·일 관계 개선의 모멘텀이 사라질지 모른다는 우려가 있었다.

우리의 끈질긴 전방위 외교노력과 국제사회의 중재로 한·일 양국은 상생의 길을 택했다. 무엇보다도 역사적 사실은 있는 그대로 반영돼야 한다는 우리의 원칙과 입장이 관철됐다. 얼마 전 제39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일본정부는 근대산업시설의 세계유산 등재에 즈음해 과거 수많은 한국인 등이 본인의 의사에 반해 동원돼 가혹한 조건하에서 강제로 노역했던 사실을 인정하고 희생자를 기리기 위한 조치를 취하겠다는 요지의 발표가 있었다. 인류문화유산은 빛과 그림자의 전체 역사를 담아야 한다는 보편적 가치가 돋보인 순간이었다.

한·일을 제외한 19개 세계문화유산 위원국 대부분이 우리의 입장을 지지했다. 이들 중 일부는 우리와 같은 역사적 아픔을 겪었고, 그렇지 않은 국가 대부분도 강제징용 피해자들에 대한 보편적 인권에 대해 깊은 이해심과 배려를 보여주었다. 그렇기에 강경했던 일본도 기존의 입장을 양보하고 강제징용 사실을 알리기로 국제 사회에 약속할 수 있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한·일 관계의 어려움 속에서도 양국이 극한 대립을 피하고 대화를 통해 문제를 푸는 지혜를 발휘했다는 것이다. 이번 문제가 해결되었지만, 8·15에 즈음한 아베 총리의 담화, 위안부 문제 등 향후 한·일이 풀어야 할 문제들은 훨씬 난이도가 높은 과제이다. 그러나 한·일 양국이 대립보다 대화를 통해 문제를 풀어가는 지혜를 살려간다면, 선순환적 관계 발전을 통해 실타래처럼 얽혀 있는 난제를 풀어갈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윤덕민 국립외교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