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 70년을 넘어 평화통일을 향해-(1부)] 이승만 독립 위한 외교 활동, 美선교사와 친분이 큰 힘

입력 2015-07-16 00:18 수정 2015-07-16 18:33
일제 말 임시정부의 구미위원부 사무실로 사용된 워싱턴 노스웨스트 16번가 4700번지 건물 뒷모습. 장면 초대 주미대사가 1949년 대사관 개설을 위해 머물기도 했다.
1921년 워싱턴 구미위원부 건물 앞에 선 워싱턴 군축회의 한국대표단 모습. 앞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이승만 전 대통령, 서재필 정한경 선생, 돌프 변호사, 비서 메이번(위 사진). 1942년 워싱턴 라파예트호텔에서 열린 한인자유대회(아래 사진).
이승만이 다녔던 워싱턴 파운드리연합감리교회. 1814년 세워진 교회로 지난해 설립 200주년을 맞이했다.
김택용 워싱턴한인장로교회 원로목사가 워싱턴의 임시정부 구미위원부 건물 앞에서 이승만 전 대통령의 활동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첫 부인 박승선 사이서 태어나 유일한 혈육… 美서 7세때 숨져 이승만 전 대통령에게는 첫 부인 박승선과의 사이에 아들 봉수(1899∼1906·미국명 Taisanah)가 있었다. 그는 이 전 대통령이 미국 조지워싱턴대에서 유학할 때 미국에 왔으나 필라델피아에서 디프테리아로 숨졌다. 이승만박사기념사업회 필라델피아 지회장인 황준석 큰믿음제일침례교회 목사와 함께 그의 묘를 방문했다. 황 목사는 “초대 대통령의 유일한 혈육이었는데 일찍 숨져 안타깝다”고 말했다. 필라델피아=글·사진 강주화 기자
미국 워싱턴DC 백악관에서 북서쪽으로 쭉 뻗은 도로를 따라 자동차로 5분 정도 달리자 침례교 간판이 세워진 2층 미색 건물이 나왔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임시정부 구미위원부(Korea Commission) 사무실 겸 자택으로 사용했던 곳이다.

내부를 돌아보려 했으나 현관에 있던 이들이 경계하는 눈초리로 제지했다.

구미위원부 건물 표지 하나 없어=취재에 동행한 김택용 워싱턴한인장로교회 원로목사는 낭패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몇 달 사이 외관이 많이 바뀌었네요. 전에 왔을 때는 빨간 지붕의 단아한 2층 양옥이었는데 리모델링을 한 모양입니다. 들어가 볼 수도 없고….”

건물을 한 바퀴 둘러봤다. 건물 곳곳의 페인트가 벗겨지고 외벽이 갈라져 콘크리트가 드러나 있었다. 이곳은 재미한인들의 독립운동 거점이었을 뿐만 아니라 장면 초대 주미대사가 1949년 대사관 개설을 위해 머물렀던 역사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하지만 어디에도 대한민국 근현대사와 관련이 있다는 흔적이나 표지판은 찾을 수 없었다.

10여년 동안 건국대통령이승만박사기념사업회 워싱턴지회장을 맡았던 김 목사는 한때 이 건물 매입을 추진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몇 해 전 알아봤을 때 매입 가격이 200만 달러였습니다. 사업회 차원에서 사려고 했지만 모금이 쉽지 않았습니다. 이 전 대통령의 경우 일제강점기 대미 외교와 건국이라는 공(功)보다 분단과 장기집권 등 과(過)를 더 크게 보는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상하이 임시정부 수반이었던 이 전 대통령은 3·1운동 직후인 1919년 8월 미국 수도인 이곳에 구미위원부를 설치했고, 1925년 임시정부의 폐지령에도 불구하고 사무실을 유지했다.

국사편찬위원회는 한민족독립운동사에서 “워싱턴국제회의(군축회의)에서의 독립청원운동 실패로 구미위원부는 유명무실해졌지만 이 전 대통령은 집념을 가지고 기관을 유지했고 미국의 정·관계 인사들과 폭넓게 교제하며 임시정부 인정과 조선의 독립을 호소했다”며 “일제가 한국의 재미 공사관마저 빼앗아갔지만 그가 거의 독자적인 힘으로 다년간 사무실을 유지한 것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고 기록한다.

이 전 대통령의 외교적 활약에는 선교사들과의 친분이 크게 작용했다. 그는 3·1운동 직후 국내외에 수립된 8개의 임시정부 중 상하이, 한성, 연해주 3곳의 임시정부 수반으로 각각 선출됐다. 주진오 상명대 교수는 “이 전 대통령이 당시 미국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으로 인식됐다는 점이 중요하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면서 “그는 배재학당 시절부터 미국인 선교사와의 밀접한 관계를 형성해왔다”고 말했다.

조선 태종의 장남 양녕대군의 16대손인 이 전 대통령은 어려서부터 과거를 준비했으나 1894년 과거제가 폐지되자 이듬해 배재학당에 입학했다. 1897년 졸업식에서는 졸업생을 대표해 ‘한국의 독립’을 주제로 한국인 최초의 영어 연설을 했다.

‘협성회보’ ‘매일신문’ ‘제국신문’ 등의 편집과 발행에 참여하던 그는 1899년 고종 폐위 음모에 가담한 혐의로 한성감옥에 투옥됐다. 일명 ‘독립협회사건’이다. 미국 공사이자 선교사인 알렌이 정부에 이승만의 석방을 요구하는 등 각국 선교사들이 그의 무죄를 주장하며 신변 보호를 요청했다. 이 전 대통령은 한성감옥에서 청·러·일의 각축, 일본의 의도, 독립정신 6대 강령 등을 담은 책 ‘독립정신’을 저술했다.

미국 전역을 돌며 독립 지지 호소=이 전 대통령은 이동녕 신흥우 이상재 등 독립협회 동지 7명과 함께 수감생활을 했고 해로이드 선교사가 넣어준 성경을 읽었다. 독립운동가 이원순은 저서 ‘인간 이승만’에서 “기도가 하루의 시종이 된 이 전 대통령의 습관은 이때 이룩됐다. 그의 성서 낭독과 기도로 40명 이상이 기독교로 개종했다. 간수까지 그의 설교를 들어 감옥이 교회 같았다”고 썼다.

그는 사형을 선고 받았지만 급격한 정세변화 속에 무기징역, 징역 10년 등으로 감형됐다가 1904년 8월 석방됐다. 상동교회는 출옥한 이 전 대통령을 청년상동학원 교장으로 초빙했다. 청년상동학원에선 전덕기 목사가 성경, 주시경 선생이 국어, 스크랜턴 선교사가 영어, 헐버트 선교사가 세계사, 최남선 선생이 국사를 가르쳤다. 강사 대부분이 애국지사나 선교사였고 무보수로 일했다.

당시 지식인들은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한미수호통상조약(1882)을 근거로 미국에 도움을 요청하려 했다. 조약에는 ‘조선이 제3국으로부터 부당한 침략을 받을 경우 미국이 개입, 조선의 안전을 보장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상동교회를 중심으로 활약하던 애국지사들은 1904년 말 이 전 대통령을 미국에 보냈다. 이 전 대통령은 당시 미국의 헤이 국무장관과 테오도르 루스벨트 대통령을 각각 면담했지만 성과는 없었다.

3·1운동 후 이 전 대통령은 임시정부 수반으로서 미국 전역을 돌며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고 임시정부 지지를 호소했다. 임시정부는 1921년 미국에서 열린 군축회의에 ‘한국독립청원서’를 제출했다. 이 회의는 태평양·극동문제에 관한 국제회의였으나 한국 문제는 열강의 관심 밖이었다. 외교독립론을 내세웠던 이 전 대통령의 행보는 무장독립론을 지지하는 독립지사들과 충돌했다.

이 전 대통령은 1925년 ‘외교에 언탁(言託)하고 직무지를 떠나…’ 등의 이유로 임시정부에서 탄핵됐다. 윤봉길 의사의 의거 후 상하이를 떠난 임시정부는 1932년 이 전 대통령을 국제연맹에 독립을 탄원할 전권대사로 임명했다. 이 전 대통령은 1939년 임시정부의 김구 주석에게 구미위원부의 부활을 요청하고, 충칭에 있던 임시정부는 이를 받아들여 1941년 그를 구미외교위원장으로 임명했다.

이 전 대통령 등 재미 한인들은 1942년 2월 워싱턴 라파예트호텔에서 한인자유대회를 열고 한미협회(Korean-American Council) 명의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임시정부 승인과 무기 지원을 요청했다. 45년 광복 때까지 독립을 향한 재미 한인들의 노력은 계속됐다. 1943년 워싱턴DC 아메리칸대학교에서 열린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24주년 기념식에선 제주 왕벚나무 네 그루를 교정에 심었다. 김 목사와 방문한 이 대학 교정에는 깊게 뿌리내린 왕벚나무가 푸른 잎을 무성하게 키워가고 있었다. 워싱턴=글·사진 강주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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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 70년을 넘어 평화통일을 향해’ 프로젝트는 국민일보·한민족평화나눔재단 공동으로 제작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