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앵무새 죽이기’ 속 미국인의 영웅인 인권 변호사는 변절한 것인가, 버려야 할 우상인가.
미국 여성작가 하퍼 리(89)의 두 번째 장편 ‘파수꾼’이 14일 미국, 영국, 스페인 등 전 세계 10개국에서 동시 출간됐다. 그녀의 출세작이자 아울러 은둔으로 몰아넣었던 ‘앵무새 죽이기’가 출간된 지 55년 만이다.
국내 저작권자로 초판 10만부를 찍은 열린책들은 서울 종로구 한 음식점에서 기자간담회를 갖고 책을 공개했다. 국내 A급 작가의 초판 부수도 요즘엔 1만부 정도에 그친다.
소설은 ‘앵무새 죽이기’의 6세 주인공이 20년이 지나 성장했을 때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인종 갈등이 첨예한 1950년대 미국 앨라배마주의 가상 도시 메이콤이 배경이다. ‘파수꾼’은 순서상으론 ‘앵무새 죽이기’의 전작이다. 1956년 30세의 무명작가 하퍼 리는 ‘파수꾼’을 쓴 뒤 출판사에 투고했다. 소설이 흑백 갈등 문제를 너무나 직접적으로 다룬다고 판단한 출판사 측은 작가에게 어린이 시점으로 새 소설을 쓸 것을 제안한다. 주인공이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형식의 ‘앵무새 죽이기’는 그렇게 탄생했다. 책의 성공은 예상을 뛰어넘었다. 1960년 출간 직후 선풍적 인기를 끌면서 작가에게 퓰리처상을 안겼고 영화로 만들어졌다. 전 세계 40개 언어로 번역됐으며 영미권에서 연간 1백만 부 이상 팔리는, 성경 다음의 스테디셀러가 됐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책의 성공은 작가에게 압박감과 함께 무력감을 가져왔다. 하퍼 리는 은둔과 절필을 택하고 후속작으로 내기로 한 ‘파수꾼’은 잊혀졌다. 원고는 지난해 말 사망한 친언니 앨리스의 금고에서 우연히 발견돼 세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파수꾼’의 내용이 공개되면서 전작에서 딸 스카웃(진 루이스 핀치의 아명)의 영웅이자 미국인의 영웅으로 다가왔던 백인 인권 변호사 애티커스 핀치가 백인 우월주의자로 변절한 것 아니냐는 논란이 일고 있다. “지금이야말로 흑인들에게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딸에게 아버지 애티커스는 “어디까지나 백인과 흑인이 다를 수밖에 없고 흑인들에게 완전히 평등한 시민권이 주어지면 큰 혼란이 일어날 것”이라고 반박한다. 전작에서 백인 소녀를 겁탈한 혐의로 기소된 흑인의 변호를 자처했던 아버지에게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인종차별적 발언이다.
역자 공진호씨는 “아버지가 변한 게 아니라 딸이 성인이 돼 아버지의 실체를 비로소 마주하는 것”이라며 “전작에서도 흑백 분리주의자로서의 면모는 곳곳에 숨어 있으며, 온정적인 입장에서 흑인의 편을 들어준 것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파수꾼’ 읽기는 ‘앵무새 죽이기’ 속 미국인의 우상을 파괴하는 과정이 될 것”이라고 “미국에서도 ‘애티커스라는 유령을 죽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서서히 나오고 있다”고 전했다.
‘파수꾼’에 등장하는 아버지와 딸의 갈등과 논쟁은 흑백갈등이 여전한 미국 사회 뿐 아니라 다문화사회에 접어든 한국 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책이 앵무새 죽이기가 그랬던 것처럼 정의와 용기, 양심의 문제에 대한 시대적 담론의 진원지가 될 지 주목된다.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
‘앵무새 죽이기’ 속 영웅이 인종차별주의자로 변절? 하퍼 리 55년 만의 신작 ‘파수꾼’ 파장
입력 2015-07-15 0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