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살던 남쪽의 M시. 그 도시의 최고 번화가인 C거리에는 당시 그 도시에 살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유명한 음식점이 하나 있었다. 이름하여 나일론회관. 나일론회관? 거짓말 같지만, 그런 이름의 음식점이 엄연히 그 도시에 실재했었다. 불고기집을 ○○가든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예전에는 ○○회관이라는 이름의 음식점이 많았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나일론회관이라는 이름까지 생겨나게 된 연유는 무엇일까.
나일론은 합성섬유의 명칭이다. 2차대전 이후 일본에서는 “전쟁 이후 질겨진 것은 여자와 스타킹뿐이다”라는 말이 유행했다는데, 바로 그 스타킹의 재료가 나일론이다. 지금은 통풍과 흡습이 되지 않는 비위생적인 섬유라는 이유로 외면받고 있지만 예전에는 나일론이 질기고 값이 싼 혁신적인 섬유로서 인기가 좋았다. 각종 의류에 사용된 것은 물론이고 어릴 적 내가 덮고 자던 이불의 겉감조차 나일론 소재의 미군 낙하산 천을 염색한 것이었다.
아무튼 질기고 값싼 나일론의 의미는 확장되어 마침내 그냥 좋은 것 일반을 가리키는 단어가 되었다. 물론 그럴 때면 나일론은 언제나 ‘나이롱’이라는 일본식 발음으로 바꿔치기되었다. 그래서 나온 것이 나이롱 방구, 나이롱 박수, 나이롱 환자, 심지어 나이롱 뽕에 이르기까지. 뭔가 새롭고 희한하고 신통방통한 것, 진짜 같으면서 가짜 같은 것이면 모두 나이롱이라는 말을 갖다 붙였다. 가히 나이롱의 전성시대였다. 그렇게 보면 당시 한국사회 자체가 나이롱이었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한국사회에서 디자인이라는 말의 쓰임새가 요상해지고 있는 것을 눈치채고 있다. 경기도 파주 교하에 갔더니 디자인교회가 있었다. 홍대 앞에는 디자이너스호텔이 있고 디자인부동산도 있다. 서울 인사동에는 새로 디자인모텔이 생겼다. 왜 이러는 걸까. 디자인이란 과연 무엇일까. 이러한 현상들을 보노라면 디자인의 학술적 의미가 무엇이냐를 따지기 이전에 어느덧 한국사회에서 디자인이라는 말이 일종의 프리미엄이라는 의미를 띠고 통용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사실 어떻게 보면 디자인의 본래적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일반 대중에게 디자인이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지는가가 결국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디자인의 의미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어차피 여러 해 전에는 정치가와 일부 디자이너들이 공모하여 ‘디자인 서울’이라는 사기판을 대대적으로 벌인 적도 있음에랴. 이런 현실에서 디자인의 신실한(?) 의미를 따지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다.
그럼에도 다시 한번 물음을 던져보자. 과연 디자인이란 무엇인가라고. 디자인이란 자본주의 소비문화의 첨병으로서 윤기가 잘잘 흐르는 물광피부 같은 것일까. 아니면 교회든 호텔이든 갖다 붙이기만 하면 뭔가 폼이 나는 그런 프리미엄급 장식어일까. 글쎄 디자인 평론을 하는 나조차 갈피를 잡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이 지금 이곳에서의 디자인이란 말이 아닐까 싶다.
디자인이란 생활문화여야 한다. 그런데 과연 우리 삶 속에 디자인이 있는 것일까. 어쩌면 한국사회에서 디자인은 나이롱 같은 것이 아닐까. 있는 듯하면서도 없고 잡힐 듯하다가도 잡히지 않는 그런 것. 한국사회에서 디자인은 평소에 조용히 있다가 필요할 때면 나타나는 영국인 집사 같은 존재가 결코 아니다.
여기저기서 디자인이 있다고 소리치며 사람들의 소맷부리를 잡아끈다. 어릴 적 M시 C거리의 나일론회관을 떠올리며, 오늘도 나는 디자인이라는 말이 넘치는 거리를 걷는다. 내 생각에 한국사회에서 디자인은 나이롱이다.
최범(디자인 평론가)
[청사초롱-최범] 나이롱, 디자인
입력 2015-07-15 0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