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종 칼럼] 육참골단의 진수를 보았는가?

입력 2015-07-14 00:59 수정 2015-07-14 07:56

두어 달 전쯤 육참골단(肉斬骨斷)이라는 말이 인구에 회자됐었다. 지난 4월 국회의원 재보선에서 새정치민주연합이 영패한 뒤 서울대 조국 교수가 이 말을 인용하면서다. 새정치연합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내 살을 내어주고 상대의 뼈를 베겠다는 각오로 쇄신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정작 육참골단의 진수를 먼저 보여준 쪽은 새정치연합이 아니라 박근혜 대통령인 것 같다. 새누리당 유승민 원내대표를 찍어내는 과정을 통해서다. 박 대통령은 이 파동에서 많은 걸 잃었다. 여당은 물론 국회까지를 힘으로 굴복시킴으로써 시대에 역행하는 제왕적 대통령이라는 이미지를 각인시켰다. 여당 내 계파 갈등을 노골화시켰고, 당청관계를 껄끄럽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야당의 협조를 얻기는 더욱 어려워졌다. 불통 이미지를 심화시키고 인간적으로 매몰차다는 인상도 심어주었다.

그러나 정치공학적 측면에서, 아니 통치공학적 측면에서 박 대통령은 얻은 게 훨씬 많다. 임기 반환점도 돌기 전에 수면 위로 떠올랐던 통치권 누수 현상을 수면 아래로 가라앉혔다. 계속되는 인사 난맥, 세월호 사건, 청와대 문건유출, 성완종 리스트, 메르스 사태, 경기 침체 등 국정이 뜻대로 풀리지 않으면서 박 대통령에 대한 국민 지지율이 떨어지자 여당 내에서부터 청와대의 말발이 먹히지 않는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박 대통령 뜻과 다르게 나온 김무성 대표의 개헌 발언, 유 원내대표의 증세 없는 복지 증대는 허구라는 발언이 그 예다.

이를 볼 때 통치권 누수 현상이 조기에 가시화되고 특히 내년 4월 총선이 끝나면 박 대통령은 절름발이 오리(레임덕)가 될 것이라는 게 공공연한 관측이었다. 박 대통령으로서는 2년 반이 넘게 남은 임기 동안 절름발이 대통령 노릇을 하지 않으려면 국면의 일대 전환을 위한 중대 결단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을 터이다. 누군가 뺨을 때려주길 기다렸는데 유 전 원내대표가 그 일을 해준 셈이라 할까. 천부의 박 대통령 승부사 기질이 발동된 것이다. 국회법 개정안에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유승민을 찍어내라고 새누리당에 요구했다. 대통령인 나와 유승민 중 택일하라는 것이었다. 유승민은 새누리당 다수인 비박계의 지지로 원내대표가 됐다. 하지만 둘 중 택일하라면 비록 비박계라도 울며 겨자 먹기로 자신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임을 박 대통령은 계산했을 법하다. 새누리당이 선거의 여왕이라는 “나” 없이 내년 총선을 치르겠다면 유승민을 선택하라고 윽박지른 것이다. 결국 박 대통령의 계산대로 유승민 사퇴에 불가(不可) 불가(不可)를 외치던 비박계의 절대다수가 불가불(不可不) 가(可)로 돌아서고 말았지 않았는가.

정치에서 내일 일을 얘기하면 귀신이 웃는다지만, 박 대통령은 이번 승부수를 통해 새누리당을 확실히 장악했다. 그래서 적어도 내년 총선 때까지는 레임덕이라든지 통치권 누수 현상이라는 말이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을 것 같다. 나아가 다음 대선 때까지도 새누리당은 집권당의 위치와 음양으로 박 대통령의 지원이 필요하기 때문에 여소야대 정국이 된다든지, 박 대통령이 반대하는 사람이 여당 후보가 된다든지 등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통치권자로서 박 대통령의 영향력은 살아있을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지금까지의 5년 단임제 대통령 6명 중 가장 늦게까지 통치권을 누수 없이 행사하는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높다.

이만하면 내 살을 내주고 적의 뼈를 베는 육참골단의 진수를 보여준 통치공학적 차원의 탁월한 승부수였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시대가 요구하는 지도자로서의 그에 대한 정치적, 역사적 종합 평가는 별개로 하더라도.

백화종 논설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