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있었던 뉴스를 소개합니다. 생명이 위독한 아이를 후송하던 구급차가 앞차와 접촉사고가 났습니다. 구급차 기사는 앞차 주인에게 심폐소생술까지 하고 있는 환자의 위급한 상황을 설명하고 보험처리를 해주겠다며 명함을 주고 병원에 보내주길 간청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사고처리를 하고 가라며 보내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고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사랑이 식어버린 세상에 다시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사랑은 ‘카도스’입니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요 15:12) 예수님처럼 사랑하는 게 바로 헬라어 ‘카도스’입니다. 즉 예수님이 죄인을 대신해 화목제물로 죽으심 같은 그런 사랑을 말합니다. 누가복음 6장 32절에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사랑할 가치가 없는 것을 사랑하신 것 같이 사랑한 것이 바로 ‘카도스’ 사랑입니다. 카도스 사랑은 예수님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랑을 요구하십니다(요일 4:11).
구체적으로 카도스 사랑은 어떤 것일까요.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요일 4:7) 즉 성도 간에 서로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다보면 카도스의 사랑을 경험하게 됩니다. 또 사랑하다 보면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알게 되고 감사하게 됩니다. 그래서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고전 16:14)고 요구하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말세의 세상을 이기는 능력이 됩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4∼25)
진리(율법)에 대해 엄격했던 바리새파와 사두개파는 어쩌면 칭찬받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도 진리에 대해 누구보다 엄격하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내가 율법을 폐하러 온줄 아느냐 완성하러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율법을 잘 지키려는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십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바리새인들의 율법에는 사랑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예수님은 육신이 약해 그 법을 지키지 못한 사람을 위해 자신이 그 사람 같이 되시고 그들을 위로하시며 구원하셨습니다.
남북전쟁이 시작될 즈음 북군을 이끈 에이브러햄 링컨은 “이 전쟁의 목표는 북군의 승리가 아니라 연합이다”고 연설했습니다. 상대방의 패배가 나의 행복과 승리가 아니라는 이 자세가 바로 카도스 사랑입니다. 카도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 13:10)
김상기 목사(이천은광교회)
[오늘의 설교] 카도스의 사랑
입력 2015-07-14 00: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