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청과 금융감독원이 최근 보이스피싱(전화금융사기) 예방·신고 홈페이지 ‘보이스피싱 지킴이’에 범인 목소리를 공개했다. 녹음된 통화 내용에는 범인이 각종 방식으로 상대를 속이려고 시도하는 과정이 담겨 있다. 미리 알고 속지 말라는 취지다.
이런 조치는 당국이 보이스피싱 피해를 막기 위해 얼마나 골머리를 앓는지 보여준다. 경찰은 피해 예방 홍보와 함께 국내 조직원 검거에 주력하지만 범행을 뿌리째 뽑는 대책은 되지 못한다. 범행을 지휘하는 총책 등 이른바 ‘몸통’이 중국을 비롯한 해외에 그대로 살아 있기 때문이다. 현지 공조 수사가 원활하지 않다는 점은 보이스피싱 조직 소탕을 더욱 어렵게 한다.
경찰청이 집계한 보이스피싱 발생건수는 2011년 8244건에서 2012년 5709건, 2013년 4765건으로 매년 크게 줄다가 지난해 7655건으로 급증했다. 올 상반기에는 4723건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65% 늘었다. 이 추세라면 2년 연속 증가할 뿐 아니라 2011년 수준을 넘어설 가능성이 높다. 상반기 보이스피싱 피해액은 677억원으로 1년 전보다 84% 불어났다.
끊임없는 예방 활동에도 보이스피싱 피해가 늘어나는 이유는 교묘해지는 범행수법 탓이 크다. 피싱 조직은 사기 수법을 빠르게 진화시키고 있다. 과거에는 상대 신원을 모르는 상태로 범행을 시도했지만 지금은 이름과 주민등록번호, 주소 같은 개인정보를 알고 접근하는 경우가 많다. 각종 기관에서 대량으로 유출된 개인정보를 입수해 보이스피싱에 이용하는 것이다.
과거에는 가족을 납치했다며 돈을 요구했지만 지금은 수사기관이나 금융 당국을 사칭해 자신들을 믿게 만든다. 수사에 필요하다며 개인정보나 돈을 맡기게 하는 식이 대부분이다. 피해자 휴대전화에 검찰이나 금감원 등 공신력 있는 기관의 전화번호가 뜨도록 해 사칭한 신분을 믿게 한 지는 오래다. 예전처럼 연변 사투리를 쓰는 범인도 거의 없다.
돈을 가로채는 방식도 다양해졌다. 지하철 물품보관함이나 우편함에 돈을 넣어두게 하는 ‘보관형’이나 금감원·검찰 직원을 사칭한 범인이 직접 피해자를 찾아가 돈을 받는 ‘대면접촉형’은 꾸준히 늘고 있다. 퀵서비스 등으로 돈을 부치도록 하는 경우(배송형)도 있다. 시중 은행이나 금감원, 검찰청 홈페이지를 베껴 만든 가짜 인터넷 사이트에 접속을 유도하는 방식(피싱 결합형)도 피해가 끊이지 않는다. 범인들은 피해자가 해당 사이트에서 입력한 개인·금융 정보를 이용해 돈을 빼간다.
경찰청이 지난 3월 9일부터 6월 25일까지 발생한 보이스피싱 3463건을 분석한 결과 피싱 결합형은 21.9%를 차지했다. 계좌로 이체하게 하는 전통적 방식(75.3%)보다 적지만 5월 160건, 6월 207건으로 증가세라는 점에 경찰은 주목한다.
현재 보이스피싱 대책은 피해 예방과 인출 차단, 인출책·송금책 검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러나 피해자가 사기를 당한 뒤 바로 신고하지 않으면 인출을 막기 어렵다. 돈이 인출돼 중국 등 해외로 넘어가면 우리 수사기관의 손을 떠난다. 경찰은 최근 보이스피싱 조직의 해외 송금 창구로 이용되는 불법 환전소 단속에 나섰지만 이미 넘어간 돈을 회수할 방법은 없다.
인출책이나 송금책을 잡아도 윗선으로 수사를 이어가기는 어렵다. 보이스피싱 조직은 주로 중국에 본부를 두고 국내에서 말단 조직원을 부리는 점조직 형태다. 국내 조직원은 지인에게 소개받거나 인터넷 등에서 구인구직 광고를 보고 가담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들은 자신이 누구를 위해 일하는지 모른 채 제 역할만 한다. 지휘부만 유지되면 이런 말단 조직원은 얼마든지 고용할 수 있다.
가장 큰 한계는 해외 수사기관과의 공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중국은 공조 수사가 특히 어려운 나라다. 중국 공안은 납치 살인 마약 등 강력 사건과 달리 보이스피싱 수사 협조에는 소극적이다. 보이스피싱은 피해가 한국에서 발생하는 범죄인 탓에 중국이 수사로 얻을 실익이 크지 않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양국이 주고받을 것도 없다. 한국에서 중국을 상대로 벌이는 조직범죄는 사실상 없기 때문이다.
당국은 협조를 구할 뿐이다. 지난 5월에는 경찰청 고위 간부가 중국을 방문했다. 경찰 관계자는 “올해 들어 태국과 중국에서 3개 보이스피싱 조직을 소탕했다. 해당 국가에서 태도가 조금 바뀌고 있는 걸로 보인다”고 말했다.
강창욱 기자 kcw@kmib.co.kr
[기획] 피해 예방·신고 홈페이지에 범인 목소리 공개했지만… 나는 보이스피싱, 근본 대책 없는 경찰
입력 2015-07-13 02: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