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도상해·준강도·공갈·절도 등 4가지 혐의로 구속돼 재판에 넘겨졌던 20대 지적장애인이 1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고 석방됐다. 장애인은 수사기관에서 범행을 자백했지만 법원은 피고인의 자백을 믿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기초적인 사실관계조차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경찰 조사 내용이 법정에서 판판이 깨졌기 때문이다. 입원 중인 어머니를 간병하다 병원 앞에서 영문도 모른 채 체포됐던 이 장애인은 무죄가 선고될 때까지 108일간 수감돼 있어야 했다.
박모(24)씨는 2011년 인터넷 채팅을 하다 알게 된 A씨(25)와 친구로 지냈다. A씨는 수시로 박씨 집에 드나들며 숙식을 함께했다. 두 사람은 모두 지능지수가 낮은 지적장애인이었다.
그런데 A씨가 지난 3월 1일 아버지와 함께 경찰서로 찾아가 박씨를 신고했다. 지난 4년 동안 박씨로부터 폭행·협박을 당했고 세간과 금품을 수시로 빼앗겼다고 주장했다. A씨 집에 있던 9만원 상당의 김치와 돼지고기를 비롯해 전기밥솥, 선풍기 등이 갈취당했다는 물건이었다. A씨는 또 박씨가 정수기 렌털가입비(55만원)와 양말·점퍼 구입비(8만원), 유선방송 가입·이용료(166만원) 등을 자신에게 대납시켰다고 진술했다. 2012년 7월 박씨가 5만원을 빼앗으면서 커터칼로 그어 부상을 입었다며 왼쪽 옆구리 상처도 내보였다. 경찰은 같은 달 23일 박씨를 체포했다.
박씨는 1차 조사 때 범행을 부인하다가 갑자기 자백했다. 경찰이 “A씨에게 욕설을 퍼부으면서 돼지고기와 김치를 가져간 일이 있습니까”라고 묻자 그는 애초 “그런 적 없다”고 답했다. A씨의 허락을 받고 가져갔다는 취지였다. 추궁이 이어졌다. 경찰이 “A씨는 지적능력이 떨어지는데 그 집에 있는 물건을 A씨 부모의 허락 없이 가져가도 됩니까”라고 재차 묻자 이번에는 “그건 잘못했다”고 대답했다. 이렇게 조사가 끝난 뒤 박씨의 진술조서는 모든 범행을 자백한 것으로 기록돼 있었다.
당시 박씨 조사는 가족이나 변호인의 동석 없이 진행됐다. 기소 뒤에 변호를 맡은 법무법인 정률의 마훈 변호사는 12일 “박씨가 덜컥 체포된 상태에서 경찰이 일종의 유도신문을 하자 ‘내가 뭔가 잘못했나 보다’라고 생각하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경찰은 강도상해죄 등을 적용해 곧 박씨를 검찰에 송치했다. 검찰도 자백을 했다는 이유로 단 한 차례 조사를 거쳐 사건을 재판에 넘겼다.
그러나 증인신문 과정에서 A씨 진술의 허구성이 드러났다. 검찰 측 증인으로 법정에 나온 A씨는 “지난 2월 27일 박씨가 강제로 끌고 가 농협에서 현금카드를 만들게 하고 통장과 함께 빼앗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변호인이 해당 시점에 두 사람이 주고받은 문자메시지를 들이밀자 말문이 막혔다. 납치 도중에 서로 문자메시지를 주고받는 앞뒤가 안 맞는 상황이 돼버린 것이다.
통장·현금카드 갈취 대목은 더 모순됐다. 변호인이 “저녁 8∼9시쯤에 농협이 문을 열던가요?”라고 묻자 A씨는 “다음 날(2월 28일) 갔던 것 같다”고 말을 바꿨다. 그러나 다음 날은 토요일이었다. A씨는 “월요일에 갔다”고 다시 진술을 번복했다. 말을 지어내다 보니 자신이 경찰에 신고한 날(3월 1일) 이후에 범행을 당했다는 황당한 증언까지 하게 된 것이다. 공판검사는 핵심 증거인 A씨 진술이 깨지자 법정에서 바로 “해당 공소사실을 철회하겠다”는 의사를 밝힐 수밖에 없었다.
나머지 범죄 사실도 상황은 비슷했다. A씨는 지난해 1월 커터칼에 베였다고 주장했지만 진료기록에는 2012년 7월 치료받은 것으로 돼 있었다. A씨는 또 지난해 4월 박씨에게 쇠파이프로 머리를 맞았다고 했지만, 기록상 두피 찰과상 치료 시기는 2013년 6월이었으며 A씨는 의사에게 “동생에게 나무로 맞았다”고 말한 것으로 적혀 있었다.
의정부지법 형사11부(부장판사 김현석)는 지난 9일 박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A씨 진술은 객관적인 합리성이나 일관성이 결여돼 있고, 박씨의 자백도 증명력이 없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A씨의 경찰 신고 배경에 대해 “통장과 현금카드를 자신이 분실했음에도 피고인에게 빼앗겼다고 거짓으로 얘기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아버지의 꾸중이 두려워 거짓말을 한 것이 박씨에 대한 수사와 구속 기소로까지 이어졌다는 얘기다.
결국 경찰이 A씨의 진술이 구체적 사실관계에 부합하는지 제대로 확인조차 하지 않고 박씨를 범죄자로 몰아갔던 셈이다. 특히 강도상해죄는 법정형이 ‘무기 또는 징역 7년 이상’인 중범죄다.
마 변호사는 “지적능력이 떨어지는 두 사람의 진술만 갖고 중대 혐의를 적용했다”며 “병을 앓고 있는 모친을 모셔야 할 박씨는 100일 넘게 구치소에 갇혀 있었다”고 말했다.
정현수 기자 jukebox@kmib.co.kr
[단독] 허점 투성이 진술 그대로 구속… 억울한 ‘108일 옥살이’
입력 2015-07-13 0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