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母子가 함께 한국선교 문 연 스크랜턴] (15) 선교현장에 드리우는 일본의 그림자

입력 2015-07-14 00:46
1905년 개최된 매년회에 당시 감리교 선교사들이 참석했다. 앞줄 중앙이 해리스 감독이며 그 좌우가 메리 스크랜턴과 윌리엄 스크랜턴. 일본 편향적이었던 해리스 감독은 한국 선교사와 교인들에게 실망감을 주었다. 이덕주 교수 제공
스크랜턴이 자신의 상사였던 해리스 감독에 대해 ‘감독님은 지나치게 친일파입니다(The bishop is pro and ultra Japanese)’라고 표현했던 편지(1905년 5월 15일). 이덕주 교수 제공
선교지에 돌아와 감회사로 복직한 스크랜턴은 지방여행을 통해 희망을 읽었다. 한국은 기근과 질병, 전쟁으로 인해 정치 사회적으로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특히 러·일전쟁으로 북한 지방 교회들이 입은 피해도 적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도 복음전파 사역은 활기차게 진행됐고 토착 교인들의 신앙은 깊어졌다. 스크랜턴은 선교 역사 20년의 한국교회 현장을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대교회’로 표현했다. 이런 가운데 선교 지역 확장과 그에 따른 사역 증가로 재정과 인력 보충은 시급한 문제였다.



선교사를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라

“한국에 적어도 선교사 20명이 필요합니다.” 스크랜턴은 선교본부에 대폭적인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선교본부의 레너드 총무는 1904년 11월 ‘지원 불가’ 입장을 표명했다. 이러한 결정은 한국 선교 관리감독으로 선출된 해리스 감독의 의견 때문이었다. 그는 부임하기도 전에 한국의 선교사들과 협의하지도 않고 결정했다. 스크랜턴은 섭섭하고 아쉬웠다. 결국 현장에서 그 대책을 모색해야만 했다. 그것은 선교사를 도와, 혹은 선교사를 대신해 복음을 전하고 교인들을 지도할 토착 목회자 양성밖에 없었다.

스크랜턴은 구체적으로 사경회와 신학회를 연계하는 토착 목회자 양성 방안을 제시했다. 이는 선교사들이 태부족인 상황에서 토착인 사역자들로부터 지원과 협력을 얻어야 한다는 현실적인 고민에서 나온 것이기도 했지만 한국교회가 선교사의 관리를 받지 않고도 스스로 유지, 운영해나갈 수 있는 자립교회로서 위상을 정립하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그는 한국교회가 경제·정치적으로 독립한 ‘토착교회’가 되기를 바랐다. 선교사는 조력자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스크랜턴은 인종적 우월감을 바탕으로 토착교회를 지배하고 통제하려는 ‘식민주의적’ 선교 의식을 경계했다. 같은 맥락에서 외국인 선교사들의 지나친 간섭을 경계했다. ‘선교사를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라.’ 이것이 그의 교훈이었다.



친일파 해리스 감독의 등장

그 무렵 동아시아 선교관리 감독인 해리스 박사가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한국과 일본 지역 선교 관리를 담당하고 있던 그는 30년 일본 선교 경력의 소유자였다. 1898년 일본 천황은 그에게 ‘서옥장’ 4등 훈장을 수여했고 1905년엔 3등 훈장을 수여했다. 도쿄 시내 한복판, 아오야마에 있는 감리교 선교부지 안에 감독관저가 마련됐고 1916년 은퇴까지 그곳에 머물며 한국과 미국을 오갔다.

해리스 감독이 첫 방한한 1905년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한반도에 대한 노골적 침략과 지배야욕을 불태우던 때였다. 한일신협약으로 초대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서울에 부임해 내정 간섭을 시작했고 일진회와 같은 친일파 단체들이 생겨 민족 내부 갈등을 부추겼다. 해리스 감독은 이런 격동기에 일본을 거쳐 방한한 것이다.

그는 5월 7일 상동교회 주일예배에서 설교를 했다. 당시 상동교회에는 정동교회, 동대문교회 교인들도 참석했다. 그런데 해리스 감독은 그날 저녁 예배는 남산 일본인교회에 가서 드렸다. 이 교회는 1년 전 일본 감리교회 연회에서 서울 거주 일본인 선교사로 파송한 기하라 목사가 설립했다. 유창한 일본어를 구사했던 해리스 감독은 통역 없이 설교했고, 일본인들과 동질의식을 갖고 친교를 나누었다. 그리고 방한 둘째 주일인 5월 14일 정동교회 주일예배에 참석해 통역 설교를 한 후 세례를 베풀었고 이틀 뒤 한 달 예정으로 만주지역 여행을 떠났다.

해리스 감독의 방한 일정은 한국 교민과 선교사들의 예상과는 달랐다. 연회를 주재하러 온 줄 알았지만 그는 연회를 6월 말로 연기해놓고 서울 도착 2주 만에 만주 여행을 떠났다. 명목은 선교 시찰이라고 했지만 러일전쟁 격전지를 순회하며 그곳에 주둔한 일본군과 거류민들을 주로 만났다. 해리스 감독의 행적은 한국 교인들에게 실망을 안겨주었다. 선교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스크랜턴은 미국 선교본부 레너드 총무에게 실망감을 토로하는 긴 편지를 썼다.

“감독님은 ‘지나치게 친일파(pro and ultra Japanese)’입니다. 우리는 지나치게 친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감독님은 가는 곳마다 일본인들로부터 열광적인 환영을 받습니다.…그러나 우리는 한국인을 먼저 동정하며 우리가 거주하는 곳의 관점에서 한국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스크랜턴이 자신의 상관인 해리스를 ‘지나치게 친일파’라고 단정한 것에서 그에 대한 실망감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당시 한·일 관계는 이웃이 아니라 가해자와 피해자였다. 선교사는 이러한 양국 관계 사이에서 중립 자세를 취해야 한다는 것이 스크랜턴의 입장이었다. 한국과 일본 선교를 관리하는 감독으로 파송됐다면 두 나라 사이의 정치적 입장을 이해하는 자세를 취했어야 했다. 전임이었던 무어 감독은 그런 입장이었다. 해리스 감독은 그렇지 않았고 다분히 일본 편향적이었다.



논산교회 박해 사건

이런 가운데 논산교회 박해 사건이 터졌다. 어린 소년이 실수로 은진의 관촉사 불상 하나를 훼손하는 사건에서 비롯됐는데 승려들은 소년이 고아인 것을 알고 곁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에게 손해배상을 요구했다. 그들은 논산교회 교인들이었는데 배상 거부로 3일간 구금을 당했다. 또 그 무렵 관촉사에 머물던 일본인 승려와 논산거주 일본인, 일진회원들은 논산교회 예배당 건축 부지 안에 말뚝을 박고 건축을 방해했고 교인들을 구타하는 일이 발생했다. 기독교에 반감을 품은 논산 지역의 불교와 수구보수 세력, 일본인과 친일파 세력이 연합해 교회를 핍박했던 것이다.

사건은 군산에 있던 일본 영사측이 미국인 선교사의 개입을 우려해 미리 손을 써서 해결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급변하는 시대 상황에서 한국교회가 감내해야 할 새로운 도전과 고난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는 것이었다. 논산교회 사건으로 일본의 영향력 증대가 기독교 선교에 장애물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예시였다.

이덕주 교수(감신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