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국을 휘몰아쳤던 폭풍이 지나갔다. 박근혜 대통령이 6월 25일 국무회의에서 국회법 개정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것이라는 건 어느 정도 예상됐던 사안이었다. 하지만 그와 함께 정치권을 향해 쏟아냈던 십자포화(十字砲火)성 발언은 예상을 뛰어넘은 것이었다. 이후 정치권은 한마디로 벌집을 쑤셔놓은 듯했다. 야당은 박 대통령을 신랄하게 비난했고 여당은 또 다른 내홍과 갈등을 겪었다.
그런데 조금 순진한 시각일지도 모르지만, 사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는 그리 큰 일이 아닐 수도 있다.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된 법률안 거부권은 헌법에 보장된 대통령의 고유 권한이다. 야당은 여야 합의로 통과된 법안을 대통령이 거부한 것을 두고 ‘민주주의의 퇴보’라는 식으로 주장했다. 그러나 여야가 합의한 법안을 거부하는 것이 대통령에게 부여된 거부권의 원래 취지다. 입법 과정에 참여하지 못하는 행정부가 국회를 견제할 수 있도록 한 헌법의 취지 자체가 그렇다. 대통령이 해당 법안이 위헌 소지가 있다고 판단하면 재의를 요구하면 되고, 국회는 재의 여부를 결정하면 되는 것이다. 물론 여러 정치적 함수를 배제하고 순수하게 법률적 관점에서만 본다면 그렇다는 얘기다.
정작 2주 가까이 정국을 요동치게 만든 것은 박 대통령의 날 서린 ‘배신의 정치 심판론’ 때문이었다. 새누리당 유승민 전 원내대표를 겨냥한 박 대통령의 작심 발언으로 새누리당은 비박(非朴)과 친박(親朴)계의 갈등과 대립으로 들끓었고, 당청 간 씻기 어려운 감정의 골도 생겨났다.
끊임없이 이어진 논란 끝에 유 전 원내대표가 사퇴하면서 상황은 이제 가까스로 수습 국면으로 넘어간 상태다. 박 대통령은 신임 정무수석을 임명했고 여당도 오는 14일 새 원내대표를 추대할 예정이다. 당청은 조만간 만날 것이고, 또 정책 협의와 조율에도 나설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갈등이 곧바로 해소될 것으로 보는 이는 아무도 없다. 중요한 것은 이제부터 빈틈을 채우고 벌어진 곳을 꿰매는 작업이다. 이 작업은 당청 모두가 나서서 해야 한다. 이것은 박근혜정부를 위해서라거나 여당을 위해서가 아니다. 여당과 청와대가 서로 신뢰도 소통도 하지 않는다면 결국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에게 돌아가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도 이제 ‘배신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야 할 때가 됐다. 박 대통령에게 배신이란 ‘믿음과 의리를 저버린다’는 사전적 의미에 그치지 않는 것 같다. 쓰라린 개인적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겠지만, 박 대통령은 배신 또는 배신자는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유달리 강조해 왔다. 하지만 정치라는 것이 마냥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만 구분될 수는 없을 것이다. 정치를 그런 대결적 구도로 인식하는 것은 다름 아닌 ‘제왕적 리더십’이기 때문이라는 비판 여론도 적지 않다.
박 대통령 임기가 반환점을 돌고 있다. 대통령의 정치철학은 바뀌지 않겠지만 스타일에 변화를 주는 건 불가능하진 않을 것이다. 당청 관계 복원을 위해 박 대통령이 먼저 손을 내밀어 여당 인사들을 두루 만나는 건 어떨지. 이후엔 야당 지도부를 초청해 만나고, 국민과 직접 만나는 것은 또 어떨지. 국민은 박 대통령에게 많은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한다. 연례적이고 형식적인 자리가 아닌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박 대통령이 기자회견을 하면 어떨까.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처럼 세련된 연설이나 감동 어린 ‘어메이징 그레이스’ 찬송가가 아니어도 좋다. 한바탕 ‘배신’의 폭풍이 지나간 자리에 남겨진 앙금과 갈등, 오해를 풀기 위한 조그만 소통과 대화가 있었으면 좋겠다.
남혁상 정치부 차장 hsnam@kmib.co.kr
[뉴스룸에서-남혁상] 폭풍이 지나간 자리
입력 2015-07-13 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