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박은 잊어라… 세밀, 한국미의 격

입력 2015-07-13 02:40
명성황후가 자신의 어의를 지냈던 릴리어스 언더우드에게 하사한 청자양각연판문주자. 음각과 양각 기법을 모두 사용해 연꽃의 잎맥을 은은하면서도 기품 있게 표현했다. 손잡이와 뚜껑에는 각각 애벌레와 나비를 조형해 장식했다. 삼성미술관 리움 제공
애벌레(왼쪽)와 나비 장식 세부 모습.
나전국당초문 원형합 세부. 리움 제공
한국미는 소박한 맛, 질박한 미로 인식되어 왔다. 하지만 이는 일제강점기 일본의 민예연구가 야나기 무네요시가 규정한 한국미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한국 미술이 열등하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는 비판이 적지 않다. 왕실과 상류층에서 향유하던 문화를 중심으로 정교하면서 화려한 예술의 전통 또한 면면하게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고려 인종 때 중국 송나라 사신 서긍은 나전의 디테일과 화려함에 반해 “세밀가귀(細密可貴)”라며 찬탄했다. ‘세밀함이 뛰어나 가히 귀하다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서울 용산구 삼성미술관 리움이 고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우리 예술품을 화려함과 정교함을 키워드로 해 조명하는 ‘세밀가귀전’을 마련했다. 국내외 40여개 소장처에서 모은 나전, 청자와 백자, 산수화와 초상화, 조각 및 장신구 등 국보(21점), 보물(26점)을 비롯한 140여점의 명품이 총출동했다. 전시는 문양(文), 형태(形), 묘사(描) 등 세 부분으로 나눴다.

서긍이 극찬했다는 나전의 화려한 문양을 보자. 동아시아 다른 나라에도 옻칠 제품이 있기는 하나, 전복껍데기를 켜켜이 잘라 문양을 넣는 방식의 나전은 한국이 유일하다. 전 세계에 남아있는 17점 가운데 대영박물관, 도쿄국립박물관 등에서 빌려온 8점이 전시됐다.

고려인의 장식에 대한 애호는 상감기법에서도 확인된다. 무늬를 파 그 자리에 다른 색 흙을 메워 무늬가 도드라지게 하는 기법이다. 자기 제작 기술은 중국에서 배워왔지만, 상감기법은 고려가 독자적으로 개발했다. 고려 사람들이 얼마나 화려한 멋을 추구했는지를 보여주는 예다. 비색 청자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주 가는 선으로 당초무늬 등을 미세하게 새겼다. 고려청자는 개항기 이후 한국을 찾은 서양인들이 무척 탐냈고, 이는 고려청자가 현재 해외 유수의 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명성황후가 자신의 어의를 지냈던 릴리어스 언더우드(선교사 호레이스 언더우드의 아내)에게 하사한 12세기 중반의 ‘청자양각연판문주자’(미국 브루클린미술관)도 이번에 한국 나들이를 왔다. 양각한 연꽃무늬 가장자리에 흰점을 나란히 찍어 마치 레이스 같다. 손잡이와 뚜껑에는 애벌레와 나비를 조형해 붙여 한편의 스토리텔링이 연상된다. 자기나 향로 등의 눈길가지 않는 부분에도 조형물이 숨어 있어 이것만 찬찬히 보는 것도 관전 포인트다.

전시는 9월 13일까지다. 하지만 ‘나전국당초문 경전함’(일본 개인 소장), ‘연사모종도’(안견, 일본 야마토문화관) 등 일부 외부 대여 작품은 전시 중 교체되므로 일정을 확인하는 게 좋다.

조선 후기 화원화가 이인문의 ‘강산무진도’는 7월 20일까지만 볼 수 있어 서두르는 게 좋다. 이 그림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이지만 8.5m 길이의 두루마리 전체가 공개되는 일은 흔치 않다. 춘하추동 4계절의 경관을 꼼꼼한 필치로 그려 인생사가 꿈결처럼 흘러가는 듯한 효과를 낸다. 유리 진열장의 천장부분을 경사지게 처리해 육안으로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볼 수 있도록 했다. 통상 고서화는 조도를 낮춘 조명 아래, 그것도 펜스 너머 멀찍이 떨어져 보기 때문에 제대로 보기 힘들다. 하지만 이번 전시에서는 대부분의 서화를 액자 속에 넣어 눈앞에서 바로 볼 수 있다는 게 장점이다.

세밀가귀라는 주제를 맞추다보니 일부 아전인수식의 해석은 거슬린다. 회화 부분에서 이런 경향이 강한데, 꼼꼼한 필치의 화원화가와 달리 조선시대 표현주의 화가처럼 심상의 풍경을 그렸던 겸재 정선의 그림, 김시의 ‘동자견려도’의 예처럼 인물을 부각시키기 위해 산수를 일부러 거칠게 표현한 조선 중기의 절파화풍은 ‘세밀가귀’라는 주제와 어울리지 않는다. 입장료 일반 8000원, 초·중고생 5000원(02-2014-6901).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