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정 마가복음 성경번역 130주년 일본 기독교 유적 답사] 꿈에 성경 보따리를 받다

입력 2015-07-11 00:01
1883년 4월 29일 이수정(뒷줄 가운데)이 세례 직후 찍은 사진으로 왼쪽이 세례를 준 조지 녹스 선교사이며 오른쪽은 세례 문답자였던 야스카와 목사. 이 사진은 1902년 1월 8일 '더 크리스천 헤럴드'지에 '이수정의 기이한 꿈'이란 제목으로 헨리 루미스 미국 성서공회 총무(앞줄 가운데)가 쓴 기고문과 함께 실렸다. 미국성서공회 아카이브 제공
일본 기독교 유적 답사팀이 지난 1일, 요코하마의 미국 성서공회 일본지부 터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뒷쪽이 요코하마컨티넨털호텔 건물.
이수정이 세례를 받은 도쿄의 시바교회로 로게츠쵸교회가 그 뿌리이다.
이수정과 초기 일본 기독교 지도자들이 교류했던 신사카에교회 전경.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소장 이덕주 교수)와 아시아언어문화연구원(원장 정제순) 답사팀 37명은 지난달 29일부터 지난 4일까지 일본의 도쿄와 요코하마, 교토, 고베 등지를 방문했다. 그곳엔 한국의 '마게도냐인' 이수정과 일본 기독교 역사의 흔적이 남아있다.

국민일보는 이수정 마가복음 성경번역 130주년을 맞아 일본 기독교 유적 답사기를 3회에 걸쳐 연재한다.

한국의 복음전래는 미국의 개척 선교사 내한(1884∼1885년) 이전부터 시작됐다. 1882년 만주에서 스코틀랜드 출신 존 로스 선교사가 ‘누가복음’을 번역했고, 복음을 접한 신자들은 자생적 공동체로 모였다. 1885년 일본에서는 이수정(1842∼1886)이 ‘마가복음’을 번역, 출판했다. 이 성경은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1885년 4월 5일 제물포 입국 시 가져온 것으로 유명하다. 이수정은 일본에 있던 미국 선교사들에게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해달라고 요청했다. 조선 근대화를 위해 일본 유학을 떠났던 그는 인생 목표를 수정했고 조국 복음화를 근대화의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이수정이 세례 받은 시바교회

지난달 29일 일본 도쿄 중심가 미타토구. 고층빌딩으로 둘러싸인 도라노몬 거리로 들어서자 베이지색 외벽의 고풍스런 교회당이 모습을 드러냈다. 직사각형 교회당 정문에는 ‘일본기독교단시바교회(日本基督敎團芝敎會)’란 글귀가 선명히 새겨져 있었다. 시바교회는 이수정이 세례를 받았던 로게츠쵸(露月町)교회가 그 뿌리이다.

1883년 4월 29일 주일. 이수정은 로게츠쵸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조지 녹스(G W Knox)에게서다. 일본에서 이루어진 한국인 최초의 개신교 세례였다. 그는 세례를 받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성경을 읽다가 꾸었다는 꿈의 한 장면이었을지 모른다.

낯선 두 남자가 다가왔다. 하나는 키가 컸고 또 하나는 작았다. 둘은 짊어진 보따리를 내려놨다. 궁금해 물었다.

“그게 무엇이요?”

“당신 나라에 가장 귀한 책이오.”

“무슨 책인데 그러오?”

“성경이라오.”

이수정은 1882년 9월, 40세 나이에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임오군란에서 명성황후의 목숨을 지킨 공으로 고종의 후의를 입었다. 당시 농학에 자극을 받았던 그는 친구 안종수의 소개로 도쿄 농학사(社) 설립자 쓰다 센(津田仙)을 만났다. 그런데 대화를 하던 중 벽에 걸린 한문 족자에 눈길이 갔다.

“虛心者福矣 以天國乃其國也(마음을 비운 자는 복이 있도다. 천국이 그의 나라가 될 것이니)”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산상수훈’의 팔복 말씀이었다. 양반이었던 이수정은 지금까지 읽었던 동양 고전 글귀와는 전혀 다른 감흥을 느꼈다. 대화는 자연히 족자의 글 풀이로 옮겨졌고 감리교도였던 쓰다 센은 호기심 많은 이방인에게 글귀의 원전인 한문성경을 선물로 주었다.

숙소로 돌아온 이수정은 ‘낯선 책’을 읽기 시작했다. 유교 경전에서는 찾을 수 없는 가르침에 탄복했다. 그후 야스카와 도루(安川享) 목사와 교제하며 본격적 신앙 여정을 시작했다. 야스카와 목사는 나중에 이수정에게 세례 문답을 했다.

로게츠쵸교회는 이수정이 미국교회를 향해 한국 선교를 요청하는 거점이기도 했다. 그에게 세례를 줬던 녹스 선교사는 이수정의 편지를 미국의 ‘세계선교평론’ 등에 발표했다. 이수정은 조선과 일본의 국제 관계를 고려해 한국 선교는 미국이 시도하는 게 좋다고 판단, 선교사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그리스도의 종 리주태(A servant of Christ Rijutei)’의 호소문으로 알려진 편지는 강한 어조였다. “혹시 미국의 선교단체가 이 부름에 응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다른 방법으로 전도자를 보내시겠지만 미국의 선교사들은 화가 있을 것이다.” 이 글은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의 내한에 영향을 줬고 이수정은 ‘한국에서 온 마게도냐인(a Macedonian from Corea·1883.12.13)’으로 알려졌다.

2차 전도여행에 나선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였다. 아시아로 가는 게 어려웠다.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않았기”(행 16:7) 때문이었다. 결국 바닷가인 드로아까지 내려갔다. 그 날 밤 사도바울은 환상을 목격했다. 마게도냐 사람이 나타났다. 그는 “건너 와 우리를 도우라”(행 16:9)고 했다. 바울은 그제서야 하늘의 뜻을 감지하고 에게해를 건넜다. 복음이 유럽으로 확산되는 계기였다. 바울의 환상 속에 나타난 마게도냐인처럼, 이수정은 서구 교회의 선교 뱃길을 아시아의 마지막 은둔국 한국으로 돌렸다.



한일 기독교 교류의 장, 신사카에교회

세례를 받고 공식 기독교인이 된 이수정은 1883년 5월 8∼13일까지 제3회 전일본기독교도 대친목회에 참석했다. 당시 대친목회는 신사카에(新榮)교회에서 열렸다. 이수정은 여기서 한국어로 대표기도를 드렸다. 그는 요한복음 14장으로 신앙을 고백했다.

답사팀은 신사카에교회로 자리를 옮겼다. 시바교회에서 멀지 않았다. 교회는 메구로구 메구로역 근처 골목에 아담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도쿄 최초의 개신교회로 1873년 설립됐다. 이수정과 일본 기독교인들이 단체 사진을 찍은 곳으로도 유명하다.

당시 참석자들은 초기 일본의 기독교 지도자들이었다. 대표적 사상가인 우치무라 간조도 그 자리에 있었고 쓰다 센도 있었다. 우치무라는 이수정의 기도를 듣고 그 감동을 일기에 적었다.

“한 사람의 한국인이 있었는데 그는 이 은둔국의 국민을 대표하는 명문의 사람으로 일주일 전에 세례를 받고 자기 나라 의복을 항상 착용하는 기품이 당당한 자로서 우리 중에 참가하고 있었다. 그는 자기 나라 말로 기도했는데 우리들은 그 마지막에 ‘아멘’ 하는 소리밖에 알아듣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 기도는 무한한 힘을 가진 기도였다.”(1883년 5월 8일)

오늘의 한국교회가 있게 한 것은 무한한 기도의 힘 때문이었다. 기독교 역사학자들은 이수정이 받아들인 복음은 ‘순전한 기독교’였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침략적 제국주의 일본 기독교가 아니라는 것이다.

답사팀을 이끌었던 이덕주 감신대 교수는 “이수정은 요한복음 14장 20절을 그리스도 가르침의 핵심으로 보고 신앙을 ‘하나님과 인간이 서로 감응하는 이치(神人相感之理)’로 해석했다”며 “그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以信得義)는 기독교의 근본 교리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성경이 인쇄된 곳, 요코하마

이수정 성경번역은 그의 기독교 여정의 절정이었다. 번역은 미국 성서공회 일본지부 총무였던 헨리 루미스 목사의 제안으로 성사됐다. 이수정의 개종 소식을 접한 루미스 목사가 ‘성경번역이야말로 한국 선교의 지름길’이라고 추천한 것이다.

처음엔 한문성서에 조선어로 토씨를 달았다. 훈독신약성서 ‘마태전(馬太傳)’ 등의 복음서였다. 그리고 1885년 2월 국한문 혼용 ‘신약 마가젼 복음셔 언땵’를 번역했다. 이들 성경은 모두 요코하마의 성서공회를 통해 간행됐다. 도쿄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을 달려 만난 곳. 성서공회는 터만 남아있었다. 그 터에는 요코하마컨티넨털호텔이 자리하고 있었고 건너편엔 일본 최초의 개신교회 카이간(海岸)교회 예배당이 보였다.

일본 메이지가쿠인대(明治學院大) 서정민(전 연세대) 교수는 “이수정은 자신이 번역한 성서를 인쇄하는 동안 수시로 성서공회를 찾았을 것이고 카이간교회에 들러 번역 성경이 국내에 전파되기를 기도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답사팀은 호텔 앞 거리에서 한일 교회를 위해 기도했다. 우중(雨中)의 간절한 기도였다. 답사팀 박흥식 서울대(서양중세사) 교수는 “이수정의 성경번역과 활동은 한국 근대사를 설명하는 고리가 된다”며 “이수정이 한일 기독교 교류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은 새롭게 조명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마가복음’을 인쇄한 곳은 요코하마의 복음인쇄합자회사이다. 1896년부터 1923년까지 많은 성경을 이곳에서 찍었다. 마가복음 한글 활자본은 정동제일교회 최초의 한국인 담임이었던 탁사 최병헌 목사가 썼다. 훈장 출신이었던 그는 한글체가 아름다웠다고 한다. 인쇄회사는 한국과도 인연이 깊어 1920년대 동인문학지인 ‘창조’를 비롯한 12가지 출판물을 인쇄했다. ‘삼대’의 작가 염상섭은 일본 유학 중 이 회사에서 식자공 아르바이트를 했다. 인쇄소는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모두 무너졌고 차이나타운 부근인 그 자리는 좁다란 식당거리로 바뀌었다.

도쿄·요코하마=글·사진 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