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의헌의 성서 청진기] 화평케 하는 자

입력 2015-07-11 00:07

최근에 ‘미움 받을 용기’라는 책이 인기다. 병원에 오는 분들 중 그 책 읽은 얘기를 하는 경우가 심심찮게 있다. 출판에 종사하는 분에게 그 얘기를 했더니, 책이 철학자와 청년의 대담으로 구성돼 있는데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에서 이런 대담 형식의 책은 흥미를 끌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인기를 끈 점이 의아하다고 했다.

나로서는 심리학자 알프레드 아들러 관련 서적이라는 점이 의외였다. 아들러의 이론은 심리학 이론 중에서 상대적으로 자주 소개되지는 않는 편이기 때문이다. 아들러 하면 ‘힘(power)’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그는 성욕과 공격욕 중에 공격욕을 더 중요시하였고, 남성성 형제순서 사회성 등에서 힘의 논리를 많이 염두에 두었다. 정치심리 등에서 이 이론이 두각을 나타내는 것은 힘에 중점을 두는 개념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보자면 나를 포함해 대다수 한국 사람은 힘의 논리에 좌우되는 사회적인 현실 속에 살아가며 아들러의 사상과 흡사한 주제에 자주 노출되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나는 성서를 보거나 사회관계를 볼 때 기득권자와 약자로 나누는 습관이 있다.

예수님은 항상 약자 편에 서서 약자를 대변하며 기득권자들에게 주의를 주셨다고 생각한다. 사회가 변하면서 약자가 어느 순간 기득권자가 되는 경우도 있다. 가정폭력의 희생자인 자식들이 어느 순간 부모를 제압할 힘이 생기면서 부모를 학대하는 경우를 본다. 초기 기독교는 순교를 당하는 전형적인 약자였지만 이후 기독교는 대표적인 주류 기득권자에 속하게 돼 잘못된 권위와 타락에 물들어 지내기도 했다.

나는 그런 관점에서 의와 정의를 고려한다. 아무리 성경에서 죄라고 지적하고 잘못되었다고 해도 그 대상이 약자라면 당장은 감싸야 하고 아무리 성경적이라고 해도 그 대상이 기득권자라면 당장은 지적을 해야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예수님이 간음한 여인을 감싸시고 바리새인을 지적하셨다고 생각한다.

그러다가 최근의 말씀 묵상은 나를 좀 혼란스럽게 한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 4:8) 결론만 간단하게 말하면 성경은 내가 기득권자라고 생각한 사람들을 오히려 품으라고 한다.

나는 그동안 약자를 품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여겼고 최근 등장하는 과도한 혐오와 권력 휘두르기, 물질과 성공의 추구가 심해서 세상 사람들에게 질타받기 딱 좋은 기독교 지도자들은 바리새인처럼 취급해 왔다. 그리 잘못된 판단도 아니라고 본다. 노련한 사람은 상대방이 감정을 아무리 건드려도 흥분하지 않고 차분하게 응대하는데, 내가 보기에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에는 노련한 사람들도 많으며 그들을 감히 대항하기는 정말 어렵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증오하는 편이다.

하지만 내가 품어야 할 사람은 그런 양극의 한쪽이 아니라 모두라는 사실을 지금은 조금씩 실감하고 있다. 예수님도 바리새인을 대항했다기보다는 계속 설득했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결실은 바울에서 찾을 수 있다.

이제 와서 세상 사람들이 기독교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원수를 사랑하라”(마 5:44)인지도 새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아, 어렵다.

최의헌 <연세로뎀정신과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