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와 삼성그룹 간 분쟁이 심해지면서 국제 헤지펀드의 ‘주주행동주의’에 대한 기업들의 우려가 커지고 있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이슈를 계기로 헤지펀드가 우후죽순처럼 한국 재벌의 취약한 지배구조를 공격하면 기업들이 또다시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있다는 공포도 확산되고 있다.
문제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기업지배구조 전문가들은 한국 재벌이 ‘방어적 자세’에서 벗어나는 것이 우선돼야 한다고 조언한다. 국내 대기업들이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한 시점에서 해외 기관투자가의 지분 매입과 이해 충돌은 피하기 어렵고, 저금리가 고착화되는 시점에 고수익을 좇는 헤지펀드의 개입은 ‘한순간에 물리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라는 설명이다. 이 때문에 총수일가 중심의 의사결정에서 벗어나 지배구조를 개선하고, 주주들과 소통을 강화하는 전략적 방향을 모색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헤지펀드와 한국 재벌의 반복된 ‘악연’=주주행동주의는 기업의 향후 실적을 전망해 투자하는 소극적 방식에서 벗어나 직접 기업 경영에 개입해 고수익을 창출하는 전략을 뜻한다. 대표적인 사례는 2003년 SK 지분을 매입한 후 경영권 분쟁을 일으킨 소버린이다. 소버린은 경영권 공백을 틈타 SK 지분 14.99%를 매입한 후 자산 매각, 주주 배당 등을 요구하며 본격적인 경영간섭에 나섰다. 하지만 2005년 경영권 장악에 실패하자 1조원에 가까운 시세차익을 챙기고 한국을 떠났다. 한국 대기업에 깊이 각인된 ‘소버린 트라우마’다. 최근 삼성정밀화학 지분 5%를 취득했다고 공시한 헤르메스도 2004년 삼성물산 주식 5%를 매입한 뒤 적대적 인수·합병 의지를 밝히며 분쟁을 일으켰다. 신장섭 싱가포르국립대 경제학과 교수는 최근 토론회에서 “주주행동주의는 국제 ‘알박기’ 펀드”라며 “소수주주 이익을 명분으로 포퓰리즘을 동원해 반재벌동맹을 규합한다”고 비판했다.
사라진 줄 알았던 헤지펀드의 악몽은 엘리엇의 등장으로 되살아났다. 엘리엇은 행동주의 전략의 핵심적인 측면을 보여주고 있다. 과거 행동주의는 실적이 나쁜 기업이나 소규모 기업에 투자해 단기차익을 극대화하는 ‘기업사냥꾼’ 이미지가 강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광범위한 분석을 통해 목표 기업의 장기수익률을 따진다. 경영참여형 사모펀드(PEF) 성격을 융합해 주주수익을 극대화하는 것이다. 특히 소수지분 매입으로도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각종 미디어를 활용해 여론전을 펼치는 전략을 쓴다. 엘리엇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을 반대한 이후 가처분 소송을 제기하기까지 과정은 이런 검증된 전략에 따른 움직임으로 읽힌다.
◇저금리 시대 각광받는 행동주의, 한국 재벌의 취약한 지배구조 주목=국제금융시장에서 행동주의 전략은 빠르게 세를 불리고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고착화된 저금리·저성장 환경에서 기업경영에 적극 개입해 주주이익을 극대화하는 전략이 통하고 있다. 투자은행 JP모간에 따르면 행동주의 헤지펀드 운용자산은 2009년 362억 달러(약 41조291억원)에서 지난해 3분기 기준 1121억 달러로 3배 이상 급증했다. 정삼영 한국대체투자연구원장은 9일 “행동주의는 헤지펀드 중에서도 지분이 4∼5%에 불과하지만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유입된 자금규모만 보면 전체 증가분의 20%를 차지한다”고 설명했다. 글로벌 헤지펀드 평가업체 헤지펀드리서치(HFR)에 따르면 행동주의 전략을 쓰는 펀드는 최근 3년간 누적수익률이 57.4%로 전체 헤지펀드 중 수익률이 가장 높다. 한국의 국부펀드인 한국투자공사도 수익률을 높이는 차원에서 2010년 10월부터 삼성물산과 분쟁을 벌이고 있는 엘리엇에 5000만 달러를 투자해 40%가량의 수익을 거뒀다.
향후 헤지펀드들은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한 한국 재벌에 주목할 가능성이 높다. 대주주가 1% 안팎의 지분으로도 순환출자를 통해 그룹 계열사들을 거느리는 취약한 지배구조, 540조원에 달하는 사내유보금을 쌓으며 기업가치를 등한시하는 경영판단을 행동주의로 바꿔내면 고수익을 낼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행동주의 펀드는 기업들이 경영상의 이유를 대며 기업가치 제고를 소홀히 하는 것이 외국인 주주들의 이해에 부합하지 않다고 판단될 경우 언제든지 행동에 나설 수 있다. 이미 삼성전자는 외국인 지분이 50%를 넘었고, 현대차도 외국인 지분이 45%에 육박한다.
◇경영권 방어장치 논의에 의존하기보다 지배구조 개선 시급=재계에서는 엘리엇의 공격이 본격화되자 경영권 방어장치 도입이 시급하다고 주장한다. 포이즌 필(적대적 인수합병에서 기존 주주에게 신주를 싸게 인수할 권리를 주는 것), 차등의결권(대주주에게는 1주 1의결권 원칙의 예외를 인정해 경영권 방어) 등이 대표적인 방안이다.
하지만 이런 논의는 과거 헤지펀드의 공격 이후에도 나왔지만 대주주의 지배권이 지나치게 강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면서 진전되지 못했다. 윤승영 기업지배구조원 연구원은 “헤지펀드의 역할에 대한 갑론을박이 있지만 분명한 것은 대기업의 오너 중심 경영체제를 개선해야 한다는 것”이라며 “기업들이 주장하는 포이즌 필 등의 경영권 방어장치는 단기처방일 뿐 지배구조를 개선하고 주주와의 소통을 늘리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백상진 기자 sharky@kmib.co.kr
[wide&deep-헤지펀드의 공격] 지배구조 취약한 재벌 먹잇감… 수천억 챙긴 뒤 ‘먹튀’
입력 2015-07-10 02: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