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반란 이후] 회생·추락 갈림길… 눈 뜨면 현금인출기 줄 서는 시민들

입력 2015-07-10 02:24

최근 들어 그리스 아테네 시내 출퇴근길은 매우 한산해졌다. 휴가철이기도 하지만 디폴트(채무불이행) 위기의 상황이 투영된 탓이다. 지난 5일 실시된 국민투표 때 61%의 시민들이 치프라스 정부를 지지했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불안한가보다. 많은 시민들은 국가 부도를 우려하면서 기름값을 아끼려고, 무료인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있다.

지난달 29일부터는 시중은행들이 영업을 일시 중단했다. 시민들이 2013년 사이프러스 금융위기 때처럼 은행예금이 손실 처리되지 않을까 우려해 대규모 예금인출을 했기 때문이다. 특히 유럽중앙은행(ECB)이 긴급유동성지원금(ELA) 한도를 동결한 후 시중은행의 담보가치를 깎자 이런 불안감이 더 커졌다. 일각에서는 자금유동성이 떨어져 은행파산 위기설까지 나오고 있다.

그리스 정부는 은행 붕괴를 막기 위해 시민들에게 1인당 매일 60유로까지만 인출을 허용했다. 요즘 매일 보이는 풍경은 현금인출기(ATM)기 앞에 10여명씩 길게 늘어선 줄이다. 그래서 현금이 귀하다. 다행히 카드결제는 이전대로 허용이 되지만, 조그만 상점에서는 카드를 받지 않아 문제다.

자동차부품을 수입하는 A사의 할베스씨는 “최근 은행 자본통제가 되면서 상당수 비즈니스가 일시 중단됐다”고 전했다. 이어 “그리스 정치가들이 잘못해서 그리스가 이 지경까지 왔다”며 “지금 정부도 신뢰할 수는 없지만, 부디 이번 3차 구제금융 협상만은 신속히 매듭지었으면 좋겠다”고 희망했다. 지금까지 만난 대다수 수입업체들은 하루속히 그렉시트(Grexit) 위험에서 벗어나길 간절히 바라고 있다.

지난 5일 국민투표 후 그리스는 국제 채권단과 3차 구제금융 협상을 시도 중이다. 이번 협상이 이전 협상과 달라진 점은 치프라스 총리가 막강한 시민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전과 달리 미소를 띠며 협상에 임하고 있다는 것이다. 야당 대표들과 함께 모여 경제개혁안 합의에 뜻을 모으면서 막강한 지원군도 얻게 됐다. 이와 함께 의도치 않게 국제통화기금(IMF)이라는 든든한 후원자도 얻게 됐다. IMF는 지난달 26일 ‘그리스 부채의 지속가능성 분석’ 보고서에서 그리스 부채를 30% 탕감하고, 만기를 20년 연장할 필요가 있다고 이례적으로 그리스를 옹호한 바 있다. 외신에 따르면 최근 다급해진 치프라스 총리가 러시아에 도움의 손길을 요청하자 발칸반도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을 차단하려는 미국이 이를 만회하기 위해 IMF를 통해 도와준다는 설도 있다.

어쨌든 이제 남은 공은 유로존 리더인 독일 메르켈 총리에게로 넘어간 듯하다. 그리스 리스크를 품고 유로존의 통합을 강화할지, 아니면 그리스 리스크를 포기하고 더 안전한 유로존을 지향할지 선택을 해야 하는 시점이다. 또 중요한 것은 잔뜩 뿔이 난 독일 자국민들을 어떻게 설득하느냐다. 독일에서는 왜 독일국민 세금으로 그리스 은퇴자의 연금을 지원해야 하는지에 대한 불만이 극에 달해 있다.

현 그리스 사태의 원인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있다. 외부에서 볼 때 정치의 부패, 포퓰리즘, 극심한 관료주의, 비대한 공무원 수, 정경유착, 과도한 복지 등이 있다. 사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리스의 입장을 들어보면 일부 억울한 부분도 있어 보인다. 1970년대에는 그리스에도 제조업이 있었다. 자동차도 생산했고, 가전제품도 생산했다. 하지만 1981년 그리스가 유럽 공동체에 가입한 후 국가 간 보호장벽이 제거됐다.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 강대국들과 경쟁하면서 그리스의 제조업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됐다. 특히 2001년 유로존에 편입되면서 자체 산업경쟁력이 상실됐다. 결국 현재 그리스는 수입에만 의존하는 경제로 전락하게 됐다. 반대로 독일 등 기타 유럽 국가들은 유로존 통합 후 그리스에 자국 상품을 마음껏 팔 수 있게 됐다. 이들 국가는 그리스로부터 많은 무역흑자를 냈다. 이런 사실을 비춰볼 때, 애초에 그리스가 독일 등 강대국들이 포진한 유로존에 편입된 것은 무리였던 것처럼 보인다. 이런 그리스 입장에선 자국으로부터 이윤을 가장 많이 본 독일 등 EU 국가들이 지금의 채권국이 됐고, 이들이 긴축만 강요하다 보니 억울하기 그지없을 것이다.

우병일 KOTRA 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