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은 지난 1월 2일 서울 양재동 사옥에서 진행된 시무식에 참석해 신년사를 했다. 발언 시간은 16분 정도였다. 준비된 원고가 있었지만, 많은 부분을 원고 없이 발언했다. 정 회장의 신년사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단어는 ‘고장’이었다. 신년사에는 고장이라는 단어가 네 번 등장했다. 그는 “자동차는 우선 고장이 없어야 되고 일반 고객의 불편이 없어야 한다”고 했고, “자동차는 여러 고장률이 적은 게 참 중요하다”고도 말했다. 신년사의 큰 주제는 친환경차 개발, 연비 개선, 한전부지 매입 등이었다. 그럼에도 고장이라는 단어가 강렬했던 것은 좀 뜬금없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당시 현대차그룹의 기세는 대단했다. 2014년 전 세계 판매 800만대를 돌파해 세계 5위의 자동차 업체가 됐고, 시무식 며칠 뒤에는 4년간 80조7000억원을 투자하겠다는 야심찬 청사진도 발표됐다.
그로부터 6개월이 지났다. 현대·기아차의 기세가 많이 꺾였다. 위기라는 말도 심심찮게 들린다. 그러다보니 자주 등장하는 단어가 ‘환율’과 ‘엔저’다. 현대·기아차의 부진은 엔저 등 환율때문이라는 논리다. 틀린 말은 아니다. 현대·기아차는 미국을 포함한 전 세계 자동차 시장에서 일본차와 경쟁한다. 엔저가 계속되니 일본차의 가격경쟁력이 높아지고, 현대·기아차가 힘에 부친다.
다만 ‘환율 해명’이 썩 만족스럽지는 않다. 일본 자동차회사 한국법인 A사장은 얼마 전 기자에게 이런 얘기를 전했다. A사장이 일본 본사에 엔저 효과 등 환율 얘기를 꺼냈더니, 본사는 ‘환율 효과는 우리 실력이 아니다. 환율 효과를 빼고 실적을 계산하라’는 지침이 내려왔다는 것이다. 세계적인 자동차부품 회사 독일 보쉬그룹은 올해 사업전망과 지난해 아시아·태평양 지역 매출을 발표하면서 환율 효과 조정 후의 매출 성장률을 병기했다. 유로화 약세로 인한 효과를 철저하게 계산해서 착시 효과를 없애겠다는 취지다. 돌이켜보면 이명박정부 시절 고환율의 덕을 많이 본 우리나라 대기업들이 ‘환율 덕 좀 많이 봤다’고 고백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일본 도요타는 2008년 회계연도에 회사 설립 이후 처음으로 4369억엔(4조844억원)의 순손실을 냈다. 2008년 전 세계적인 금융위기에다 2009년에는 미국에서 대규모 리콜 사태에 휘말렸다. 2011년에는 동일본 대지진까지 터졌다. 당시 경제 전문가들은 도요타 부활에 상당 기간이 소요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하지만 도요타는 예상과 달리 2012년부터 글로벌 1위 자리를 되찾고 흑자전환에 성공했다. 한국 도요타 관계자는 “갑작스러운 외부 변화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한 내부 생산 방식을 혁신한 게 적중했다는 게 본사의 설명”이라고 말했다. 도요타 창업가문 3세인 아키오 사장은 2009년 취임 이후 “기본에 충실한 최고의 품질로 만들라”는 주문을 되풀이했다고 한다.
정 회장이 왜 신년사에서 고장이라는 단어를 여러 차례 언급했는지 알 수 없다. 신년사에 ‘환율’이라는 단어는 등장하지 않았다. ‘엔저’라는 단어는 한 번 나온다. 정 회장은 “우리가 엔저의 도전을 (받고 있는데), 생산성 향상과 원가 절감 노력으로 능동적으로 (극복)해야 되지 않겠느냐”고 했다.
개인적으로는 고장이라는 단어가 환율보다 신선하다. 위기는 여러 요인으로 발생하지만, 대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은 내부에서 나온다. 현대·기아차의 2분기, 3분기, 연말 실적 발표에서 엔저나 환율보다는 ‘고장률 제로’ ‘무한 품질 책임’과 같은 좀 더 멋진 단어를 듣고 싶다.
남도영 산업부 차장 dynam@kmib.co.kr
[세상만사-남도영] 정몽구 회장의 ‘고장론’
입력 2015-07-10 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