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누리당 유승민 원내대표가 8일 밝힌 ‘사퇴의 변’에 박근혜 대통령을 향한 직접적인 메시지는 없었다. 대신 그는 헌법 제1조 1항에 명시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가치를 새삼 언급하면서 박 대통령과 청와대를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국회 정론관에 선 유 원내대표는 준비해온 원고를 담담하게 읽어 나갔다. A4용지 2장 분량의 ‘원내대표직을 내려놓으며’였다. 그는 “고된 나날을 살아가는 국민 여러분께 새누리당이 희망을 드리지 못하고 저의 거취 문제를 둘러싼 혼란으로 큰 실망을 드린 점은 누구보다 저의 책임이 크다”고 사과했다. 유 원내대표는 본인의 거취를 논의하는 의원총회에 참석하지 않고 오전 내내 의원회관 사무실에 머물렀다. 원고도 직접 쓰고 다듬었다고 한다.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은 그 다음부터였다. 유 원내대표는 “평소 같았으면 진작 던졌을 원내대표 자리를 끝내 던지지 않았던 것은 제가 지키고 싶었던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어 “그것은 법과 원칙, 정의”라며 “저의 정치생명을 걸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임을 천명한 우리 헌법의 지엄한 가치를 지키고 싶었다”고 강조했다. 지난 2주간 친박(친박근혜)의 대대적인 사퇴 압박에도 버텼던 이유를 처음으로 직접 밝힌 것이다.
당청 갈등이 불거진 데 대한 소회나 ‘배신의 정치’를 거론한 박 대통령에 대해 언급이 없었던 것도 이런 인식의 연장선상으로 해석된다. 청와대가 여당 의원들이 뽑은 원내대표를 노골적으로 흔들어 물러나게 한 것이 헌법정신에 위배된다는 의미로도 읽힌다. 유 원내대표와 가까운 의원은 “이 한 문장에 하고 싶은 말이 함축적으로 담긴 것 아니겠느냐”고 했다.
유 원내대표는 “고통받는 국민의 편에 서서 용감한 개혁을 하겠다는 약속도 아직 지키지 못했다”고 했다. 유 원내대표 측은 ‘아직’이란 표현에 의미를 뒀다. 한 의원은 “따뜻한 보수, 합의의 정치는 원내대표로서가 아니라 정치인 유승민이 추구하는 가치”라며 “앞으로 어떤 자리에서든 그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했다. 유 원내대표가 생각과 가치를 공유하는 의원들과 독자 세력화를 모색할 수 있다는 해석이 뒤따랐다. 친박, 친이(친이명박) 이후 별다른 계파가 없던 새누리당에 ‘유승민 사단’이 존재한다는 점이 이런 전망을 뒷받침한다.
권지혜 기자
[유승민 사퇴] 劉, 헌법 1조1항 거론하며 朴 우회적 비판
입력 2015-07-09 0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