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승민 사퇴] 소신과 직언 사이… ‘원박’서 ‘반박’으로 틀어졌다

입력 2015-07-09 02:15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2월 청와대에서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를 접견하며 악수하고 있다. 가운데는 김무성 대표. 이날 만남은 새로 선출됐던 원내 지도부와의 상견례 자리였다. 국민일보DB
8일 새누리당 원내대표에서 물러난 유승민 의원에 대해선 ‘소신 정치인’, ‘유아독존형’이라는 평가가 공존한다. 판사 출신의 국회의원이었던 아버지(유수호 전 의원) 밑에서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를 밟은 주류 경제학자이면서도 부자·대기업 증세, ‘중(中)부담·중(中)복지’를 지향하는 보수 정치인이다.

유 의원은 ‘원조 친박’으로 알려져 있지만 정확히 말하면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 사람이다. 한국개발연구원(KDI) 선임연구위원 시절 이 전 총재에게 발탁돼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장을 맡으면서 정계에 입문했다.

유 의원은 2004년 17대 총선에서 비례대표로 국회의원이 됐다. 그리고 이듬해 1월 한나라당 대표 비서실장으로 깜짝 발탁됐다. 이때 당 대표가 박근혜 대통령이었다. 비례대표 초선에게 당 대표 비서실장을 맡기는 건 이례적인 일이다. 이때 인연을 계기로 유 의원은 ‘원박’이라는 꼬리표를 달게 됐다.

이후 2005년 10월 유 의원은 대구 동을 재선거에 출마했다. 박 대표는 유 의원 당선을 위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이후 유 의원은 이 지역에서 내리 3선을 하며 TK(대구·경북)의 맹주로 부상했다. 박 대통령이 지난달 25일 국무회의에서 ‘배신의 정치’를 언급한 것은 이런 배경에서다. 유 의원도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박근혜 캠프의 정책메시지 총괄단장으로 뛰었다. 이명박 당시 후보의 BBK 주가조작 사건 등을 집중 파헤치면서 ‘이명박 저격수’를 자임했다.

박 대통령과 유 의원 사이는 2009년부터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완전히 손을 놓지는 않았다. 2011년 한나라당 최고위원이었던 유 의원은 ‘선관위 디도스 사태’로 당이 위기에 처하자 최고위원직을 던졌다. 이는 지도부 총사퇴로 이어졌고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이 등장하는 발판이 됐다. 박 비대위원장은 2012년 총선을 승리로 이끌었고, 여세를 몰아 그해 대선도 거머쥐었다.

유 의원은 박 대통령을 돕는 중에도 생각이 다른 부분에 대해선 직언을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 박 비대위원장 주도로 한나라당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바꿨을 때 반대 의사를 분명히 밝힌 것이 대표적인 예다. 지난 2월 원내대표 취임 후엔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라면서 박근혜정부의 정책 기조를 정면으로 반박했다. 두 사람 사이가 틀어진 결정적인 계기를 콕 찍을 순 없지만 사소한 대립들이 쌓여 결국 멀어졌다는 게 여권 내 해석이다.

박 대통령과 유 의원 모두 소신을 굽히지 않는 원칙주의자여서 결국 정적이 됐다는 평가도 나온다. 공교롭게도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73년 정권 뜻을 거스르는 법관들을 무더기 면직시켰는데, 이때 유 의원의 부친 유 전 의원이 법복을 벗었던 ‘악연’이 있다.

권지혜 기자 jhk@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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