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김영석] 정치인 박근혜, 대통령 박근혜

입력 2015-07-09 00:30

1998년 이른 봄 40대의 한 예비 정치인이 기자를 찾았다. 상대 후보의 금품 살포가 도를 넘어섰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눈물까지 글썽였다. 다음날 유세 현장에서 만난 그는 전날의 눈물은 아랑곳없이 ‘나라’와 ‘국민’의 중요성을 청중에게 알리고 있었다. 책 읽는 듯한 어눌한 연설이긴 했지만.

2006년 이른 겨울이었다. 그 정치인과 함께 중국을 찾았다. 아침 일찍 댜오위타이(釣魚臺)를 함께 산책하다 그는 갑자기 “저기 붕어에서 물이 뿜어져 나와요”라고 했다. 붕어 형상의 분수대를 바라보면서다. 이어 기자들을 향해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 법부터 해서 지구를 드는 방법까지 특유의 썰렁 개그를 쏟아냈다. 어눌했지만 소통 노력이 묻어있었다.

다음해인 2007년 늦여름 서울 올림픽체조경기장. 그는 비서실장으로부터 쪽지를 건네받았다. 패배의 내용이다. 미간이 잠시 흔들렸던 그는 이내 “안 된 거죠? 알았어요”라는 짧은 한마디를 건넸다.

그는 연설대에서 “오늘부터 저는 당원의 본분으로 돌아가서 정권 교체를 이루기 위해 백의종군하겠습니다”라고 했다. ‘아름다운 승복’으로 기록된 명연설이었다. 그날 저녁 자택을 찾은 측근 의원들이 소리 내어 울자 “제가 남자들을 많이 울리네요”라고 미소로 화답하기도 했다. ‘정치인 박근혜’였다.

순수했던 정치 초년병, 소통 개그하던 정치인, 패배에 승복했던 경선 후보. ‘정치인 박근혜’를 규정했던 단어들이었다.

2015년 이른 여름 ‘대통령 박근혜’는 너무도 달랐다. 지난달 25일 국무회의 석상에서 12분 동안 정치권을 향해 격정 비판을 쏟아냈다. 새누리당 유승민 원내대표를 향한 화살은 하이라이트였다. 박 대통령의 목소리 톤은 평소보다 3배 이상 높았다고 한다. 메모를 하던 한 국무위원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는 모습이 TV 화면에 잡히기도 했다.

야당은 ‘유승민 찍어내기’ ‘여왕’ ‘제왕’ ‘유신 시대의 공주’라는 거친 단어들을 쏟아냈다. 여당 내부에서조차 너무 심했다는 말이 나왔다.

박 대통령의 거센 공격에 놀란 여당 지도부는 바짝 엎드렸다. 유 원내대표는 ‘대통령께서 마음을 열어 달라’고 반성문까지 써야 했다. 정치권 모양새는 박 대통령 의도대로 흘러갔다. 한발 더 나아가 사정 정국을 조성할 것이라는 관측마저 나돌고 있다. 그러나 정치권과 싸우는 대통령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시선은 상당히 불편해 보인다. 국민을 위한다는 명분이었지만 ‘국민은 없고 정치만 있다’는 평가가 많다.

집권 반환기에 선 ‘대통령 박근혜’는 ‘정치인 박근혜’와 왜 다른 평가를 받게 됐을까. 정치권 주변에선 박 대통령이 과감히 버려야 할 것이 3가지가 있다고들 한다. 사람, 시간, 정치다.

우선 ‘예스맨’만 넘쳐나는 청와대의 변화다. ‘비서실장 왕따설’ ‘홍보 없는 통보 라인’ 이너서클 등에 대한 말들이 많다. 지시보다는 소통을, 호통보다는 유머를 전달해 줄 라인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것이다. 2007년 미국의 한 호텔방에서 복도에까지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고성을 주고받던 당시 캠프 수장 같은 인물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다음은 시간이다. 박 대통령은 ‘시간이 없다’는 말을 자주 한다. 정치권은 박 대통령이 조급해졌다고 한다. 뚜렷한 성과가 없다보니 너무 서두르고 있다는 것이다. 집권 시간은 반이나 남아 있다.

마지막으로 정치다. 지금 대통령은 ‘여당 총재’로 비춰지고 있다. 말 한마디로 여의도를 전쟁터로 변화시켜 버린 것이다. 정치를 초월할 필요가 있다. 정치보다는 통치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한다. 국민들은 ‘투사 대통령 박근혜’보다 진실, 유머, 승복이 존재했던 ‘정치인 박근혜’를 기대하고 있을지 모른다.

김영석 정치부장 ys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