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곽효정] 아직 대추나무에 사랑 걸려 있을까

입력 2015-07-08 00:20

섬진강을 따라 걸은 적이 있다. 강이 시작되는 옹달샘부터 바다가 되는 지점까지 걷고 또 걸었다. 나는 자주 길을 잃었다. 강이 갈라지다 합쳐지기도 했고 인적이 드문 곳은 풀이 무성해 강 가까이 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한 번은 갈라졌던 강을 쫓다 길을 잃고 어느 마을에 도착했다. 마을회관 앞 정자에서 쉬고 있는데 한 할아버지가 다가와 물마시고 싶으면 회관으로 오라셨다. 그때부터 그는 마을 자랑을 시작했다. 갈라졌던 두 강이 합해지는 곳이라 ‘합강리’라 불리는 그 마을에는 마을을 사랑하는 어르신들이 살고 있었다.

잠시 후 회관에는 그 어르신들이 하나 둘 모이더니 분주히 움직였다. 내게 차가운 물을 건네준 한 할머니가 “오늘 돼지 잡았으니 학생도 그것 먹고 가”라고 하셨다. 나는 “섬진강을 따라 걷다가 길을 잃었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다른 할머니가 “더 잘됐네, 여기서 요기 하고 가, 잃어버린 길은 가다 보면 다시 나타난다”고 하셨다.

그렇다. 길을 잃었으면 그곳에서 쉬면 될 것이고 힘을 얻어 다시 길을 떠나면 될 것이다. 내가 가고자 하는 곳이 명확하다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섬진강은 다음날이 되어도 사라지지 않을 테니 잠시 쉬어가자 싶었다.

그리하여 합강리 마을회관에서 수저를 놓는 일이나 소일거리를 도우며 고기가 익기를 기다렸다. 젊은 사람이 귀했던지라 할머니들은 “우리 손녀 생각 나”라면서 나를 예뻐해 주셨다.

한 상이 푸짐하게 차려졌을 즈음 어르신들이 한자리에 둘러앉아 식사를 하겠거니 했는데 생각과는 다른 광경이 펼쳐졌다. 회관 안쪽 문이 열리고 이 할머니, 할아버지보다 더 지긋한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공손한 걸음으로 상을 들여와 맛있게 자시라 인사하고 나서야 제 밥그릇을 찾아 식사하기 시작했다. 어릴 적 ‘전원일기’나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에 나오던 장면 속에 내가 들어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우리가 잃어버린 길은 어른을 공경하고 더불어 사는, 이런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곽효정(에세이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