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흉악범 잡느라 부순 문짝, 누가 보상?

입력 2015-07-07 02:25
지난해 5월 8일 부산의 한 편의점에 이모(25)씨가 들어섰다. 손에 망치를 들고 있었다. 종업원 A씨(23·여)를 인질로 잡고는 출입문을 진열대로 막았다. 할 말이 있다며 서울의 방송사 관계자를 불러 달라고 소리쳤다. 출동한 경찰특공대는 인질극 상황을 파악한 뒤 ‘진압’ 결정을 내렸다. 출입문 유리를 깨고 들어가 테이저건으로 이씨를 검거했다. 자칫 인명피해로 이어질 뻔한 순간이었다.

이렇게 ‘사건’은 끝났지만 ‘보상’ 문제가 남았다. 인질을 구출하느라 편의점 출입문이 부서지고 창문이 깨져 300여만원의 재산피해가 발생했다. 경찰의 공무수행 중 생긴 불가피한 ‘손실’이다. 인질극이 벌어진 편의점의 부서진 출입문은 누가 물어줘야 할까.

그동안 경찰 규정에는 명확한 보상체계가 없었다. 문을 부순 경찰이 직접 사비로 물어주곤 했다. 서울의 한 경찰서 강력계장은 “인명 구출이나 강력범 검거 때 기물이 파손되면 해당 경찰이 물어주는 게 관례였다”며 “우리 직원들에게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신경 쓰지 말라’고 말하곤 했지만 직원들 입장에선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이런 관행이 결정적으로 문제를 드러낸 게 2012년 ‘오원춘 사건’이다. 그해 4월 경기도 수원에서 20대 여성이 112에 구조 요청을 하고도 오원춘에게 무참히 살해당했다. 당시 출동한 경찰은 범인의 옆집을 수상히 여겨 조사하려 했지만 집주인이 별다른 기척을 하지 않자 1시간30분가량을 허비했다. 무리하게 문을 따고 들어갔다간 사비로 변상해야 한다는 생각에 머뭇거리느라 ‘골든타임’을 놓친 것이다.

이런 폐단을 줄이기 위해 경찰청은 지난해 4월 ‘손실보상제도’를 신설했다. 긴박한 사건 현장에서 몸을 사리지 말고 범인을 검거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출입문이 부서진 부산의 편의점 주인도 이 제도에 따라 경찰 예산으로 약 300만원의 보상금을 받았다.

국민일보가 지난 1년간의 ‘손실보상제도 지원 내역’을 6일 입수해 분석한 결과 총 142건에 6300만원이 지급됐다. 변사·자살·가정폭력 신고를 받고 출동해 사건 현장의 출입문 등을 강제로 열고 들어간 경우, 불법 게임장이나 성매매 업소 단속 과정에서 출입문을 파손한 경우 등이 90%를 차지했다.

특이한 사례도 있었다. 지난해 5월 살인사건을 수사한 충남 아산경찰서는 한 농부에게 100만원을 지급했다. 살인범이 그 농부의 밭에 시신을 암매장했다고 자백해 경찰은 시신을 찾느라 밭을 파헤쳐야 했다. 훼손된 농작물을 보상해준 것이다.

올해 손실보상에 책정된 예산은 2억7000만원이다. 경찰청 관계자는 “지금 추세대로면 이 예산으로 충분히 보상액을 감당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손실보상제도를 악용하는 경우도 많다. 지난 3월 18일 저녁 서울의 한 주유소 앞에서 B씨가 불법 유턴을 했다. 이를 발견한 교통경찰이 단속을 위해 서행을 유도하는 과정에서 B씨의 차량을 손바닥으로 쳤다. 그러자 B씨는 차량 주유구가 손상됐다며 100만원이 넘는 금액을 물어내라고 청구했다. 이 청구는 기각됐다. 손실 발생 책임이 B씨에게 있고, 경찰이 차량을 파손했다는 증거가 없어서다.

지난해 경기 고양경찰서의 한 지구대로 “정신착란증을 앓고 있는 중학교 2학년 딸이 집에서 소란을 피운다”는 신고가 접수됐다. 가정폭력이 의심되는 상황이었다. 경찰이 출동했지만 신고자인 어머니는 문을 열어주지 않고 기다리게 했다. 집 안에서 계속 비명소리가 들리자 경찰관은 노루발못뽑이로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다. 다행히 모녀의 단순한 다툼이었다. 그런데 이 어머니는 경찰에 출입문 수리비를 물어내라고 했다.

“왜 죽게 내버려 두지 않았느냐. 물어내라”는 황당한 청구도 있었다. 서울 중랑구의 다세대주택에서 흉기로 자살을 시도하던 C씨는 출동한 경찰의 대화 시도를 몇 시간이나 거부했다. 경찰이 출입문을 부수고 들어가 흉기를 빼앗고 그의 목숨을 구했는데, 그는 왜 출입문을 부쉈냐며 경찰에 손실보상청구를 냈다.

이런 상황은 현장 경찰들에게 심리적 부담이 되고 있다. 서울의 한 강력팀 형사는 “보상청구가 기각된 후에도 돈을 내놓으라고 찾아오는 경우가 가끔 있다”고 했다. 관련 절차가 너무 까다롭다는 지적도 나온다. 손실보상이 청구되면 해당 경찰관은 정당한 공무집행이었음을 증명하기 위해 근무일지, 증거물, 경위서 등을 제출해야 한다. 서울의 한 지구대 관계자는 “현장에서 검거하기도 바쁜데 어떻게 파손된 기물 사진을 일일이 찍어서 증거로 남기나”라고 말했다.

박세환 기자 foryo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