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前) 종교개혁자(Pre-Refomer)’로 꼽히는 체코의 얀 후스(Jan Hus·1369∼1415)는 영국의 존 위클리프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라 독자적 사상가였으며 체코 토착 개혁운동의 영향을 받았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장윤재 이화여대(기독교학부) 교수는 6일 부산시 동구 중앙대로 부산YMCA 세미나실에서 개최된 ‘얀 후스 순교 600주년 기념포럼’에서 “후스의 종교개혁은 마르틴 루터 종교개혁의 전야가 아니다. 그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온전한 종교개혁이었다”며 “후스의 뿌리는 체코의 토착 종교개혁 사상가들”이라고 밝혔다.
이날은 후스가 1415년 콘스탄츠공의회에서 이단자로 낙인찍혀 화형을 당한 지 정확히 600년이 되는 날이었다. 그의 죽음은 기독교 역사 2000년 가운데 가장 장엄하고 아름다운 순교로 꼽힌다. 사형 집행 전 “당신은 지금 거위 한 마리를 불사르려 하지만 100년 후에는 불태울 수 없는 백조가 나타날 것”이라고 말한 일화는 유명하다. ‘거위(goose)’라는 뜻의 그의 이름 때문에 역사가들은 “혁명(종교개혁) 전야에 시끄럽게 운 거위”로 묘사한다.
장 교수에 따르면 후스는 체코 토착 개혁가들인 얀 밀리치와 마테이가 주장한 ‘성만찬 신학’에 기초해 개혁사상을 전개했다. 이들 성만찬 신학은 당시 로마 가톨릭이 사제는 떡과 포도주를 모두 받았지만 일반 신자는 떡만 받던 관례를 깨고 모든 성도에게 성만찬을 베풀어야 한다는 사상이었다. 후스는 이를 계승하면서 사제집단의 특권적 우월성은 폐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 교수는 “체코 종교개혁의 핵심은 급진적 기독교 평등주의였으며 이런 혜택은 당시 가난한 농민들에게 돌아가 교회 소유 토지의 75% 이상과 수도원 건물 170개가 사회로 환원될 수 있었다”며 “이는 체코 농민들이 후스주의운동을 광범위하게 지지한 이유”라고 말했다.
후스는 카를대학(프라하대학 전신) 교수와 총장을 지내면서 개혁의 빛을 발했다. 그는 라틴어 위주의 설교에서 체코어로 설교했으며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단순 명료한 설교 3000편을 남겼다. 또 사제와 찬양대원의 전유물이었던 찬송을 1000년 만에 대중(회중) 찬송으로 복구시킨 주역이기도 했다. 그의 ‘공간 혁명’은 지금도 체코 교회에 남아있는데 직사각형 모양의 예배당을 정사각형 형태로 만든 ‘베들레헴 채플’을 조성, 성화나 조각상을 치우고 중앙에 설교단 하나만 설치해 예배 참석자들이 모두 같은 거리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도록 했다.
장 교수는 “후스는 교회활동을 금지당한 후에도 광야와 거리에서 설교했다”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로 돌아갈 것을 역설했다”고 말했다. 그는 “7월 첫 주일을 얀 후스의 종교개혁주일로 기념하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
얀 후스 순교 600주년… 부산서 기념포럼 열려
입력 2015-07-07 00: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