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일이다. 선배의 책상에는 전국 지도가 붙어 있었다. 시·군 단위로 경계만 표시돼 있는 하얀 지도에는 색연필로 색이 구분돼 있었다. 이를테면 경북 안동시는 초록색, 전북 진안·장수군은 노란색으로. 이유가 뭔지 궁금했다. 선배는 초록색은 가본 곳, 노란색은 가보지 못한 곳이라고 했다. 가본 곳의 기준은 엄격했다. 다른 곳을 가기 위해 그냥 스쳐간 곳은 가본 곳이 아니다. 일부러 마음먹고 머문 곳, 그 지역의 핵심 콘텐츠를 찾아가본 곳만 가본 곳이다. 그렇게 전국의 모든 시·군을 다 돌아보는 것이 선배 인생의 목표 중 하나였다. 240여개 시·군·구를 거쳐 우리나라를 꼼꼼히 들여다보겠다는 것이다. 얼핏 소박해보이나 결코 소박하지 않은, 원대한 계획이었다.
새삼 옛일이 떠오른 것은 최근 산업계에 불고 있는 국내 여름휴가 장려 바람 때문이다. 올여름 휴가는 해외보다는 국내로, 가능하면 일찍 떠나 오래 머물며 전통시장에 들러 지역 특산물을 사자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침체된 내수경기를 살려보겠다는 취지다. 가뜩이나 갈 길이 멀던 우리 경제는 올 봄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이라는 복병을 만났다. 여기에 극심한 가뭄까지 겹쳤다. 다소 살아나는 듯했던 경기는 꽁꽁 얼어붙었고, 각종 경제지표와 하반기 전망은 어둡다. 특히 메르스가 확산됐던 지난달 국내 관광산업은 세월호 때보다 6배나 타격을 입은 것으로 조사됐다.
전국경제인연합회 대한상공회의소 등 경제단체들과 삼성 현대차 등 대기업들이 내수경기 살리기에 나선 것도 당연한 수순이다. 허창수 전경련 회장은 최근 직접 경기도 양평 화전마을을 찾아가 감자를 캐고, 서툴지만 감자전도 부쳤다. 마을 특산품인 콩을 맷돌로 갈아보고, 손으로 만든 순두부도 맛봤다. 허 회장은 “농촌은 도시인들이 평소 접하기 힘든 전통문화와 먹거리를 체험하고 아름다운 자연도 즐길 수 있는 곳”이라고 말했다. 삼성그룹 역시 임직원들의 여름휴가를 앞당겨 실시하고, 국내여행을 장려하고 있다.
허 회장의 농촌 방문과 삼성의 발표. 자칫 식상해보일 수도 있지만 의미가 적지 않다. 어느 사회든 리더들이 나서는 것엔 상징성이 있다. 사장이 농촌으로 여름휴가를 떠나면 임원이 국내로 발길을 돌리고 직원들도 자연스레 쫓아가기 마련이다. 물론 이런 캠페인으로 1년 동안 해외 여름휴가만을 고대해온 이들의 마음이 바뀔 리는 없다. 하지만 외국으로 갈까 말까 고민 중인 사람들, 심리적 경계에 있는 이들을 끌어당기는 데는 분명 효과가 있다. 작은 움직임이 큰 효과를 만들고, 작은 성의가 모여 큰 변화를 만드는 법이다.
오랜만에 선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곳에 가봤을지 궁금했다. 경북 경주시 근방이 고향인 선배는 의외로 전남은 거의 가봤는데 경북 내륙엔 가보지 않았다고 했다. 봉화·영양·군위군이 그런 곳이다. 국토순례 차원에서 가볼 수는 있지만 아직 확 당기진 않는단다. 지역에서도 ‘떠날 준비가 된’ 관광객을 끌어들일 방안을 계속 찾아야 할 듯하다.
다들 여름휴가를 국내로 떠나라는 요즘이 기회다. 이 참에 못 가본 곳, 한번쯤 가보고 싶었던 곳으로 발길을 돌려보면 어떨까. 나만의 국토사랑 지도를 만들어보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인도네시아 발리나 태국 푸껫 등에 비해 내 나라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는지도 모른다. 찾아보면 좋은 곳이 무척 많을 텐데 말이다. 올 여름엔 나를 풍성하게 채워줄, 인생의 이야기를 만들어줄 나만의 국토 지도를 하나하나 채워보는 건 어떨까. 길을 떠난 만큼 생각은 뻗어나갈 것이다.
한승주 산업부 부장대우 sjhan@kmib.co.kr
[뉴스룸에서-한승주] 내 나라 내 땅 어디까지 가봤니
입력 2015-07-06 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