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스크랜턴이 1903년 3월 선교사직 사임 의사를 밝혔을 때 한국교회와 사회 상황은 악화일로였다. 당시 떠도는 민간 속담에는 ‘신축년에 남편 찾기’란 말이 있었다. 불가능한 것을 해보려고 쓸데없이 애쓰는 것을 빗댄 말이었다. 신축년이었던 1901년은 흉년과 기근이 전국을 휩쓸어 수많은 사람이 죽고 가정이 파괴됐다. 신축년 재앙은 경제, 사회적 위기를 초래해 하와이 노동이민이 추진됐고 감리교의 경우 서부지방 장로사였던 존스 선교사가 이에 적극 가담했다. 인천과 강화, 황해도 지방 교인들이 대거 하와이 이민 행렬에 합류했다. 한국 감리교회는 스크랜턴과 아펜젤러의 부재로 상실감과 위기감을 느꼈다. 설상가상으로 감회사 직책을 수행하던 존스 부부도 1903년 5월 휴가를 얻어 한국을 떠났다. 출국 당시 건강이 좋지 않았던 그는 사임 의사를 밝혔다. 미국 선교본부는 스크랜턴에 이어 존스까지 사임을 표하자 크게 당황했다.
스크랜턴 모자의 복귀
그런 가운데 스크랜턴이 한국 복귀 의사를 밝혔다. 1903년 11월 말이었다. 사임의사를 번복한 이유는 알려지지 않는다. 다만 두 달 전인 9월, 그를 찾은 존스 선교사와 나눈 30시간의 대화가 동기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당시 만남에서 스크랜턴은 존스에게 사임을 만류했던 것으로 보인다. 스크랜턴은 대화 후 선교본부에 편지를 보내고 존스를 계속 선교사로 붙들어 두라고 조언했다. 결국 존스는 3년 후 정동교회 담임으로 파송을 받으며 복귀했다. 어쨌든 스크랜턴은 존스와의 대화 속에서 개척자들이 모두 떠난 한국교회의 위기 상황에 자신들도 책임이 있음을 느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 상황에서 어머니 메리 스크랜턴의 건강도 눈에 띄게 호전됐다. 스크랜턴 대부인은 미국에 돌아온 후 한국 복귀의 꿈을 결코 포기한 적 없었다. 그녀는 외부 출입이 가능할 만큼 기력을 회복하자 아들에게 한국으로 돌아갈 의사를 밝혔다. 메리 스크랜턴은 1903년 12월이면 만 71세가 됐다. 선교사 정년(70세) 연한도 넘겨 복귀할 의무가 없었음에도 한국에 대한 사랑이 컸던 것이다. 그의 조카였던 스티브 벤턴은 건강 우려로 만류했으나 그녀의 귀환 의지는 확고했다. 그리하여 아들 스크랜턴은 자신뿐 아니라 어머니도 함께 서울로 돌아가겠다는 의사를 뉴욕의 선교본부에 전달했다. 이런 스크랜턴의 뜻을 전달받은 선교본부 관계자들은 크게 기뻐했다.
마침내 어머니 스크랜턴과 스크랜턴 부부, 첫째 딸과 막내딸은 이듬해인 1904년 9월 초 다시 서울에 도착할 수 있었다. 특히 21세가 되는 맏딸 오거스타는 볼티모어여자대학을 졸업한 후 서울 외국인학교 교사로 채용돼 서울에 돌아왔다. 선교사 자녀들이 다니는 학교 교사였다는 점에서 준 선교사 신분이었다. ‘내한 선교사 2세’로는 처음으로 부모가 사역하는 현장에서 함께 일하게 된 것이다.
이들은 원래 봄에 도착할 예정이었으나 그해 러일전쟁이 발발하면서 한국행은 무기한 연기됐다. 스크랜턴의 귀환만 연기된 것이 아니었다. 한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과 토착 목회자들의 여행도 중단됐다. 윌리엄 스크랜턴은 귀환을 기다리면서 자신의 심정을 담은 편지를 평양에서 목회하던 김창식 목사에게 전달했다. 그 내용은 1904년 7월 발간된 ‘신학월보’에 소개됐다.
스크랜턴은 편지에서 갑오년(1894년) 청일전쟁 이후 한국교회가 크게 부흥했던 것을 상기시키면서 러일전쟁이 끝난 후에는 오히려 교회가 부흥할 것이라며 한국 교인들을 위로했다. 그는 주변 열강들의 각축장 한복판에 놓인 한반도 상황에 대해 “러시아와 일본이 서로 대한을 먹으려 하나 종국에는 ‘천국(天國)’이 지배할 것”이라고 선언함으로 정치적 위기를 신앙적 지혜와 용기로 극복할 것을 권면했다. 그는 한국이 기독교 국가가 되는 것에서 한민족의 미래를 보았다. 그것이 그가 선교사로 한국에 다시 오려는 궁극적 이유였다.
선교 20주년 기념 선교대회와 지방 선교여행
스크랜턴은 돌아오자마자 미 감리회 한국선교회 ‘감회사’ 직책을 이양 받았다. 그가 복귀해 첫 번째 참석한 공식 행사는 9월 14일 개최된 남감리회 한국선교회 제8차 매년회였다. 그는 축사에서 미국 남북 감리교 연합으로 잘 운영되고 있는 배재학당과 목회자 양성과정(신학회), 문서출판 사역의 지속적 발전과 협력을 증진하자고 했다.
연회가 끝나자마자 9월 22일에는 북장로회 언더우드 선교사와 함께 ‘선교 20주년 기념 선교대회’를 개최했다. 이 대회는 알렌 내한 20년을 기념해 개최됐다. 선교대회는 한국 개신교 선교를 개척했던 당사자들이 직접 회의를 주재하거나 참석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선교사들은 20년 선교 역사를 정리, 점검했다. 또 현장에서 제기되는 각종 현안과 주제를 가지고 토론했다.
하디(미 남감리회)가 개회 기도회를 인도했으며 새뮤얼 마펫(미 북장로회)이 ‘한국 복음화 정책과 방법론’을, 그리어슨(캐나다 장로회)이 ‘복지사역과 한국 복음화’, 게일(미 북장로회)이 ‘한국인과 성경’, 엥겔(호주장로회)이 ‘토착문화와 관습’ 등을 주제로 발표했다. 알렌은 미국공사 신분으로 참여했으며 언더우드가 오전 회의를, 스크랜턴이 오후 회의를 각각 주재했다. 스크랜턴으로서는 아펜젤러의 빈자리가 컸다. 자신이 한국을 떠난 사이 희생의 본을 보이며 세상을 떠난 아펜젤러였기에 그리움이 더했다.
스크랜턴 가족은 새로 예수를 믿고 교인이 된 한국인들을 맞이하는 것으로 사역을 재개했다. 스크랜턴은 한 교인의 말을 인용, 소개했다. “당신은 (병원에서) 내게 기독교에 대해 가르쳐 주었으나 그때는 어리석은 말이라 생각했소. 그런데 지금은 나도 당신과 같은 기독교인이 되었소.” 복음전도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결과는 확실했다. 스크랜턴 모자가 하던 병원과 학교에서 복음을 소개받았을 때 거부했던 이들이 고백적 신앙인이 되어 감사를 표했던 것이다.
스크랜턴은 지방 교인들의 요청에 부응해 순회 선교여행을 떠났다. 1904년 9월부터 연말까지 16주 가운데 7주를 순회에 할애했다. 황해도 해주지방을 시작으로 수원 공주 인천 강화 평양 영변 등이었다.
이덕주 교수(감신대)
[母子가 함께 한국선교 문 연 스크랜턴] (14) 스크랜턴 모자 복귀, 선교 사역 재개
입력 2015-07-07 0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