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사관 부족해 112도 동원, ‘비밀장부’와 숨바꼭질… 성완종 수사팀 뒷이야기

입력 2015-07-04 02:15
‘성완종 리스트’ 수사의 핵심 갈래 중 하나는 실제 존재할지 모르는 ‘비밀장부’와의 숨바꼭질이었다. 특별수사팀(팀장 문무일 대전지검장)은 수사 시작 단계부터 의혹을 방증할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의 비밀장부 추적에 집중했지만 지난 5월 말까지 ‘장부는 없다’고 좀체 단언하지 못했다. 성 전 회장이 생전 로비자금 전달자나 목격자를 만나 장부를 복기했다는 얘기마저 나돌았다. 그가 남긴 메모 한 장 쥐고 시작한 수사팀은 실낱같은 힌트의 진술도 일일이 검증했다.

압수수색에 나선 수사팀이 112신고를 해 경찰관들을 불러 모은 사연도 있었다. 4월 15일 오후 4∼5시쯤 경남기업 내부 자료가 회사 옆 오피스텔 지하주차장으로 옮겨졌다는 첩보를 입수해 급파된 상황이었다. 당일 워낙 동시다발적인 압수수색이 진행되다 보니 현장 장악에 필요한 인력이 부족했다. 112 신고라는 임기응변에 따라 출동한 경찰관들이 부족한 수사관의 자리를 메워 줬다. 다만 이때 결정적 물증은 나오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부단한 조사 결과 비밀장부는 실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에 이르렀지만, 뭔가가 애초 전혀 없었다고 확신하긴 여전히 어렵다. 경남기업은 특별수사팀이 구성되기 1개월 전부터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부장검사 임관혁)의 강제수사를 받고 있었다. 이 시기에도 증거은닉·인멸이 벌어진 정황이 수사 과정에서 점점 구체화됐다. 수사팀은 경남기업 지하 1층 창고에서 대형파쇄기를 맞닥뜨린 뒤 그 규모에 크게 놀랐다고 한다. 너비가 5m가량인 파쇄기는 한쪽 벽면을 거의 덮을 정도의 덩치였다.

성 회장 여비서의 행동이 첨예한 쟁점이 된 일도 있었다. 3월 18일 경남기업에 대한 수사 보도를 접한 박준호(49·구속 기소) 전 상무와 이용기(43·구속 기소) 비서실장은 오전 6시30분쯤 성 전 회장의 여비서에게 전화를 걸어 회장실을 정리하라고 지시했다. 성공불융자금과 법인자금 용처 자료는 물론 성 전 회장의 동선을 입증할 수 있는 문건들이 이 때문에 사라졌다고 수사팀은 의심했다. 이날 여비서의 출근 시각이 평소보다 빨랐는지, 택시를 이용했는지, 평소 화장을 하지 않고 출근하는지 등에 대해서도 수사팀과 변호인단 간 공방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3월 25일 박 전 상무 등이 회계자료를 카트에 담아 지하주차장 등지로 옮길 때 CCTV를 끈 사실은 조직적 은폐 시도로 받아들여졌다. 이 과정에도 소소한 뒷이야기가 있다. 한 사원이 “상무님, CCTV를 끌까요”라고 물어, 급한 김에 “그래 꺼라”하고만 답한 게 이후 증거인멸이란 심각한 문제가 됐다는 것이다.

수사팀은 빼돌려진 경남기업의 은닉자료를 일부 확보했다고 4월 26일 밝혔는데, 이 자료는 수사에 별다른 가치가 없었다. 박 전 상무는 쇼핑백에 넣어 차량 안에 숨겨 뒀던 자료를 수사팀에 임의제출했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이는 성 전 회장의 2012년 4월 총선비용 집행내역이었다. 공천헌금 등 로비와 거리가 있는 단순 금전출납부에 가까웠다. 의원직 ‘4수’에 나섰던 성 전 회장이 고향인 서산·태안의 중식당에서 쓴 돈 따위였다.

수시로 소환된 경남기업 직원들은 한동안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수사팀이 꾸려진 서울고검 청사 주변에서 자주 모습이 포착된 일부 참고인은 “이곳에 출근하다시피 한다. 일터에서 해고될 지경”이라며 짜증을 냈다. 대화를 청하는 기자에게 다짜고짜 욕설을 퍼붓는 이도 있었다. 시간이 지나자 이들은 슬리퍼를 신고 나와 여유롭게 담배를 피우기도 했다.

조사를 받는 이들만 피로했던 것은 아니다. 수사팀 문턱을 매일같이 넘던 참고인들은 “검사가 며칠째 같은 셔츠를 입고 있다” “수염이 덥수룩하다”고 말하곤 했다. 수사팀 구성원들은 이제는 사라진 대검찰청 중앙수사부를 표방해 일했다고 한다. 시시각각 떨어지는 지시를 유기적으로 따랐고, 쉬는 날이 없어 요일을 잘 몰랐다.

수사팀은 2일 수사결과를 내놓으면서도 많은 내용을 속 시원히 공개하지는 않았다. 재판 전략이라는 입장이다. 수사팀은 다음주 해체가 아닌 축소 수순을 밟는다. 일부 인력이 남아 새누리당 이인제(67) 의원, 새정치민주연합 김한길(62) 의원의 불법 정치자금 수수 의혹 수사를 마무리한다.

이경원 기자 neosar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