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만 인구의 거대 도시 서울에서 3년 만에 ‘마을’이란 이름을 내세운 공동체 2100개가 새로 태어났다. 마을공동체 지원을 신청한 주민만 5만8800명, 조성된 공동체에 가입해 활동한 주민은 총 8만4000여명이다. 서울시가 2012년 처음 마을공동체 지원사업을 시작할 때 결코 예상치 못했던 성과다. 마을공동체, 마을기업 등으로 변주된 여러 시도와 변화는 이제 서울을 넘어 크고 작은 다른 지방자치단체로 번지는 중이다. 왜 우리는 지금, 다시 마을을 만드는 것일까.
회색 도시를 그림으로 바꾸다
서울 성수동에는 아마추어 ‘화가’들의 동아리가 있다. 2012년 9월 21일 연필 한 자루, 종이 한 장씩 들고 주민 다섯 명이 모여 시작한 ‘그림마실’이다. 초기 멤버이자 모임 총무를 맡고 있는 원동업(47)씨는 “역사적 풍경도, 다양한 문화 콘텐츠도, 붐비는 상점도, 첨단 건물이나 구획된 거리도 없는 성수동에 생활 터전을 잡고 내 아이를 위해서라도 주변 환경을 조금씩 바꿔보자는 생각에서 시작했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3개월에 만원씩 회비를 걷었다. 마을공동체 경험이 있는 시민미술단체 ‘늦바람’의 이주연 사무국장을 초청하고 성수1가1동 주민자치센터 공간을 빌려 소묘, 수채화 등을 배웠다. 2013년 5월에는 첫 전시회를 열었다. 마을예술창작소 지원사업에 신청해 지원금 300만원을 받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이 돈으로 처음 이젤 15개를 마련해 마을센터에 두고 썼다. 선뜻 가기 힘들던 전시회도 찾아갔다. 드나든 사람을 제외한 고정 회원수가 12명으로 늘었다. 지난해도 지원금 200만원을 받아 활동을 이어가던 그림마실은 올해 자립을 선언했다.
원씨는 “지원을 받으면서 활동하기는 훨씬 편해졌지만 소박하게 그림 그리는 즐거움에 몰두하기는 힘들어졌다”며 “다른 분들에게 지원받을 기회를 드리고 우리는 다시 그림의 기쁨에 빠져보기 위해 자립을 결심했다”고 말했다.
자립을 위해 회비를 3개월에 2만원으로 올렸다. 액자 등 자원을 재활용하기도 하며 허리띠를 졸라매는 중이다. 무상으로 사용하고 있는 주민센터 공간은 큰 힘이 됐다. 원씨는 “지난 3년 동안 회원들은 세상을 더 풍요로운 곳, 아름다운 곳으로 보는 눈을 가지게 됐다”며 “우리가 사는 마을을 조금씩 함께 바꿔가는 재미가 있다”고 말했다.
‘유대’를 향한 본능
‘그림마실’이 그렇듯 엄밀히 말하면 마을은 생겨난 것도, 만들어진 것도 아니다. 발굴됐다고 하는 편이 옳다. 전문가들은 마을공동체가 경쟁사회의 폐단을 속속들이 맛보고 시작된 ‘절박한 자정작용’이라고 진단한다. 우수명 대림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벌어지는 경쟁사회는 사람들의 관계망을 황폐화시켰고, 이를 극복할 자원인 품앗이 정서도 사라졌다”고 분석했다. 이어 “인간은 서로 어울려 안정감을 느끼려는 본능을 갖고 있다. 관계 복원, 인간성 회복을 바라는 마음이 ‘공동체’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킨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찬호 성공회대 교양학부 초빙교수도 “우리 사회는 고도성장기가 막을 내릴 무렵에야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한 대가로 성취감·자존감·유대감 등 돈으로 살 수 없는 가치를 상실했음을 깨달았다”고 했다. 김 교수는 “이를 회복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과정에서 마을공동체가 등장했다”고 봤다.
혼자 사는 가구는 늘어나는데 사는 지역을 옮기는 이주는 잦아드는 최근 흐름도 마을공동체 발달에 기여하고 있다. 지난해 서울서베이 도시정책지표조사에서 서울시 전체 가구 중 1인 가구는 38.0%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여기에 2인 가구를 합하면 전체의 48%나 된다. 한 거주지에 계속 사는 경향은 점점 뚜렷해지고 있다. 5년 안에 이사할 계획이 있는 가구는 24.2%로 2007년 이후 최저 수준을 기록했다.
이호 풀뿌리자치연구소장은 “마을공동체는 경쟁에 치여 피로감을 느낀 현대인이 과거의 공동체 문화를 회상하면서 등장한 반작용의 일종”이라고 했다. 이 소장은 “경쟁 체제에서 문제의식을 느끼는 사람이 많지만 ‘나만 공동체적 가치를 앞세우면 손해를 본다’는 의식이 아직 팽배하다”며 “이런 상황에서 용기를 내 나선 사람들을 중심으로 마을공동체가 꾸려졌고, 다른 방식의 행복도 있다는 걸 가시적으로 보여주기 시작하는 단계”라고 설명했다.
이태동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육아나 교육처럼 삶과 밀접하고 중요한 이슈에 대한 해법을 가족 국가 시장 등에서 얻을 수 없다고 보고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끼리 기존 체제와 다른 새 방식을 모색하자며 뭉치기 시작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목표 그리고 리더, 공간
마을공동체가 힘을 발휘하려면 세 가지 선행조건이 필요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다른 방법’에 대한 공동의 목표다. 마을공동체의 모태가 된 공동육아 커뮤니티 역시 그랬다. 김찬호 교수는 “2010년대 육아 방법을 고민하던 지역 엄마들이 ‘함께 키우는 것이 좋다’는 아이디어에 힘을 실으면서 공동육아가 시작됐다”고 말했다. 그는 성공한 마을공동체인 ‘성미산 마을’ 역시 성미산 개발사업이 빚을 환경 파괴에 대한 주민들의 공감대에서 출발했다는 점도 언급했다.
두 번째 열쇠는 ‘사람’이다. 김 교수는 “주민들이 동네에 주인의식을 가진 상황에서 공동체를 만들겠다는 뛰어난 리더가 나설 때 마을공동체가 태동한다”고 분석했다. 김명희 서울시 마을지원센터 협력기획팀장은 “앞서 다른 지자체에서 지역 특성을 활용한 ‘마을체험’ 등 경제 활성화를 위해 행정구역 단위의 마을을 부각시킨 것과 달리 서울의 마을은 관계망 중심의 소프트웨어 복원”이라고 했다.
이 때문에 자발적인 주민이 등장해야 한다. 서울시는 주민 세 사람이 모여 공익활동을 하면 연간 100만원을 지원하는 마을공동체 ‘씨앗기 사업’을 통해 이를 장려한다. 더 이상 단체나 기관만 정부 예산을 따내는 것이 아니다. 김 팀장은 “이제까지 주민의 행정 참여가 거수(擧手) 기능에 그쳤다면 마을공동체에선 실질적으로 계획을 세우고 실행한 뒤 평가할 수 있도록 하는 주민 주도성이 부각된다”고 강조했다.
공동 공간은 마을공동체를 결집시키는 기반이다. 김 교수는 “오프라인에 공동 공간이 있어야 구성원들이 마을공동체를 실질적 ‘터전’으로 인식하고 지켜나가기 쉽다”며 “성공적 공동체로 자리 잡은 천왕마을의 경우 80%가 장기임대 거주자인 상황에서 ‘사랑의 카페’ 같은 마을공간이 조성된 덕이 크다”고 말했다.
마을공동체의 내일은 ‘홀로서기’
서울시의 마을공동체 활동 지원은 3년이 만기다. 2013년 첫해부터 줄곧 지원을 받아온 마을공동체 중에 만기를 채워 더 이상 지원받을 수 없는 마을이 내년부터 나오게 된다. 이 때문에 마을 주민의 주도성이 더욱 절실해졌다.
주민의 자발적 참여가 촉진되고 있기는 하다. 서울시 마을지원센터는 지난해 주민이 자발적으로 만든 모임 수가 기존 단체의 2배를 넘어섰다고 밝혔다. 주민이 직접 심사해 선정된 사업은 2013년 27개에서 지난해 556개로 급증했다. 다만 지원에 대한 의존도는 여전하다. 우 교수가 지난해 5개 자치구의 마을공동체 참여자 173명을 조사했더니 응답자의 93.2%는 여전히 마을계획 수립 시 외부지원의 필요성을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김 팀장은 “예산이 끊기자 맥을 못 추는 마을도 있다”며 “3년차가 돼 사업 만기를 맞은 만큼 예산과 생존율의 상관관계를 면밀히 조사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호 소장은 “서울시 정책이 마을공동체의 양적 확산에 성공한 점은 높이 평가하지만 앞으로 이를 자생적으로 발전시켜 질적 유지를 도모하는 게 과제”라고 했다.
더 열린 마을을 지향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이 소장은 “각각의 마을공동체가 서로 연계망을 확대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야 일상의 미시적인 의사결정이 ‘정치’와 ‘시장’이라는 거시적인 체제로도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마을의 전성기가 아직 오지 않았다고 입을 모았다. 우 교수는 “공동체와 개인화 사이의 작용·반작용은 수세기 동안 인류 역사에 걸쳐 계속된 싸움”이라며 “돈이 중심이 되는 사회일수록 ‘사람’의 가치를 높이 사는 공동체문화가 점점 더 사람들의 마음을 얻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수민 고승혁 기자 suminism@kmib.co.kr
[왜 우리는 마을을 꿈꾸나] 마음 모인 마을
입력 2015-07-04 02: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