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흘러가 버리는 것 같다. 그러나 그 시간은 기억이나 흔적 속에 고여 있어 찾아가면 되살아난다. 기억이란 참 엄청난 신비를 지닌 힘이란 생각이 든다. 기억이 없으면 시간도 없고 어쩌면 나도, 인생도 없는 거나 다름없지 않을까.
2007년 7월 19일, 우리와 전 세계를 충격의 폭풍으로 몰아넣은 국제적인 인질사건 ‘아프간 피랍 사건’이 있었다. 아프간으로 봉사활동을 떠난 샘물교회 소속 23명이 탈레반에게 납치됐다. 이들은 샘물교회에서 떠난 20명의 단기 봉사팀과 3명의 현지 선교사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일로 배형규 목사와 심성민 형제가 희생당했다. 다른 21명은 그 어두운 터널처럼 긴 불안의 42일 만에 극적으로 풀려나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 폭풍의 소용돌이 안에서 슬픔보다 더 참기 어려운 것은 비난의 아우성과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오해들이었다. 우선 ‘왜 아무 연고 없고 불안정한 아프가니스탄에 갔는가’였고, 정부가 만류하는데도 떠난 무모함에 대한 질타였다. 그리고 유서는 왜 썼으며, 현지에서 ‘눈에 띄는 관광버스를 타고 경찰의 보호를 요청하지 않았는가?’ ‘왜 공격적인 선교를 해야 하는가’에 대한 들끓는 듯한 세상의 비난이었다. 아무도 누구의 얘기도 들으려 하지 않고 자기 말만 쏟아내고 더구나 그 안에는 사랑보다는 미움의, 어쩌면 광기(?)조차 느껴지는 순간들이었다.
이 단기 봉사활동은 갑작스럽게 계획된 것이 아니었다. 이미 샘물교회는 아프가니스탄에 7명의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었다. 북부 마자리샤프 지역에 3명이 의료봉사와 교육, 남부 칸다하르에서는 내과의사 부부가 가난하여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무상으로 치료, 2명의 여자 선교사는 유치원을 세워 아이들을 돌보고 있었다.
비자와 출국 수속이나 탑승 수속 등에 대해서도 당시 납치되었던 유경식 외 13명이 쓴 아프가니스탄 간증집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2010)에서 저간의 사정을 밝히고 있다.
지금 샘물교회 순교자기념관 앞 입구 벽 로비에는 강명순의 ‘순교자’ 작품이 그 아픔을 상기시키고 있다. 2명의 순교자를 내고서도 아직 사태는 예측할 수 없는 불확실성의 절박감 속에 있을 때였다. 작가는 배형규 목사가 6개월 전 죽음에 대해 설교한 내용을 기독교 방송에서 다시 방영하고 있는 순간 깊은 슬픔과 묵상 속에 작품의 영감을 얻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항상 죽음과 함께 어찌 죽음을 맞이할 것인지를…. 가슴이 뻥 뚫린 하늘을 향한 절규! 그 옆에 슬퍼하는 우리들, 안보하는 천사 2명. 배 목사님의 죽음은 결코 헛되지 않으리. 아래 부분에는 새싹들이 피어난다.”(복음의 씨앗, ‘작가작업기’ 2007년 8월 2일)
그림에서 절규하며 슬퍼하는 하얀 뼈처럼 서 있는 두 사람은 기도자이자 순교자이고 하단에 나뭇잎들은 부활과 생명의 씨앗을 표상하는 것 같다. 강명순은 이지적이고 치열한 작가정신의 소유자이자 사유가 깊고 깊은 신앙인이다. 커다란 캔버스에 점 하나 찍고도 갈등이 없다면, 그 그림은 성공한 그림이 아닐까. 배형규 목사님은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리스도의 고통과 사랑을 실천으로 보인 분이다. 당시 그가 남긴 말대로 온전한 헌신은 자신의 가장 귀한 것을 드리는 일이다. 피랍자들의 다음과 같은 기도는 그의 순교에 대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답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는 사랑하는 배 목사님과 성민이를 하나님께 돌려드리고, 그 대신 저 수많은 아프간 민족, 그리고 탈레반을 형제로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중)
이석우 (겸재정선미술관장, 경희대 명예교수)
[이석우 그림산책] 가장 소중한 것을 드리는 아픔-순교
입력 2015-07-04 00: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