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버클리음대 첫 시각장애인 교수 치국(chikuk) 김(33). 그의 이름은 한국인이라면 누구에게나 아주 친숙한 명사, 바로 ‘김치국’이다. 교수와 학생들은 ‘국(kuk)’을 발음하기 어려워 그를 ‘치(chi)’라고 부른다.
김 교수는 1985년 선천적 심장병 수술 후유증으로 시력을 잃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기도와 가족들의 헌신으로 밝게 자랐다. 그는 할 수 없는 일에 집중하기보다는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며 살아 왔다. 앞을 보지 못하는 대신 피아노를 만났으며, 중학교 시절에는 컴퓨터에 빠져 살았다. 고등학교 때 영어를 배우기 위해 미국으로 갔지만 실용음악이 그를 끌어당겼다. 29세에 세계적 명문 버클리음대 최연소 교수가 되어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김 교수는 지난해 말 ‘소리로 세상을 밝히다’(두란노서원)를 펴내 주목을 받았다.
지난달 25일 인터넷 포털 사이트 네이버 초청 강연차 서울에 온 김 교수를 서울 용산구 온누리교회 예배당에서 만났다.
그의 이름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음식점을 경영하는 등 외국 생활을 많이 한 부친이 지었다. 한국 사람들이 제일 먹고 싶어 하는 것이 김치라며 가장 중요한 사람이 되라는 의미로 지었다고 했다. 큰누나는 ‘김치다’, 둘째 누나는 ‘김치내’다. 3남매는 어릴 때 아버지가 엄한 존재였기에 한 마디 불평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밖에 나갈 때도 혼자 다니게 하셨어요. 눈이 멀쩡한 사람도 인내심이 없으면 험한 세상에 살아남을 수 없는데 장애가 있는 사람은 더하잖아요. 길을 가다가 넘어져도 남들이 일으켜줄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더 강인해진 것 같아요.”
시력을 잃고 피아노를 얻다
앞을 보지 못하는 남동생에게 누나들이 치는 피아노 소리는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4세 때 피아노를 처음 치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1학년이 되자 점자 악보를 읽으며 제법 피아노를 잘 쳤다. 어머니는 앞을 보지 못하는 어린 아들을 데리고 자주 기도원을 다녔다. 한번은 예배를 드리던 중 갑자기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설교가 끝나고 찬송하는 시간에 그만 정전이 돼버린 것이다. 갑작스러운 일에 사람들은 당황했고 예배는 중단됐다. 그때였다. 어머니가 어린 아들을 툭 치며 말했다.
“치국아, 네가 나가서 피아노를 한 번 쳐봐.” 어머니는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피아노가 있는 곳으로 아들을 안내했다. 차가운 건반 위에 손을 올리는 순간, 알 수 없는 전율이 그의 몸을 휘감았다. 고사리손끝에서 시작된 피아노 반주가 어둠 속에 울려 퍼졌다. 어둠과 혼란 사이에서 들려오는 반주 소리에 사람들은 입을 열어 찬양하기 시작했고 예배는 다시 활기가 넘치게 됐다.
사람들은 어둠 속에서 은혜로운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피아노를 연주한 사람이 도대체 누구인지 궁금해했다. 그때 소년의 어머니는 들뜬 목소리로 사람들에게 아들을 소개했다.
“오늘 피아노를 친 아이는 제 아들 김치국입니다.”
“김치국?”
그의 이름을 들은 사람들은 큰 소리로 웃었다. 예배에 참석했던 한 외국인 선교사는 다시 한번 그의 이름을 물었다.
“아이 이름이 뭐라고요?”
“김치국이요. 김치 스프!”
그 말에 다시 한번 기도원이 웃음바다로 변했고 그도 신나게 웃었다고 했다.
헬렌 켈러를 가르친 설리번 선생님 같은 사람
대전맹학교 출신인 그는 16세에 영어 공부를 하러 미국 필라델피아로 건너갔다. 영어를 배우러 간 학교에서 배운 과목은 ‘리더십’이었다.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새로운 길을 개척해 나가는 자세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에게 음악의 기초를 알려준 곳이 한국의 교회였다면 음악이 어떤 의미인가를 알려준 곳은 미국 서부 옥시텐탈칼리지였다. 그곳은 음악의 기본을 확실하게 배울 수 있는 작지만 명성 있는 학교였다.
그런데 문제는 기숙사 룸메이트가 동성애자였다는 것. 학교 당국에 룸메이트를 바꿔달라고 했다. 어이없는 답변이 돌아왔다. “치, 당신의 룸메이트가 시각장애가 있는 당신을 이해하고 용납해주듯 그가 동성애자라는 것을 당신도 이해하고 용납해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는 이 같은 답변을 듣고 조용히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2003년 보스턴에 있는 버클리음대에서 재즈와 현대 실용음악을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이곳에서 작곡과 프로듀싱을 복수 전공했다. 시각장애인으로서는 선례가 없을 만큼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했고 이어 뉴욕대학에서 음악 기술과 영화음악을 전공했다. 글로벌 음반사인 EMI의 자선음반 제작에도 참여했다. 또 선배들과 세로토닉스라는 회사를 설립, 다큐멘터리와 영화를 제작하는 등 다방면에서 재능을 보여주고 있다.
버클리음대에서 한밤중에도 불을 켤 필요가 없는 유일한 곳이 김 교수의 강의실이다. 강의실에 처음 들어오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하는 말은 “스위치 어디에 있어요?”이다. 하지만 암흑 속에서 일하는 김 교수에겐 빛보다 소리가 더 소중하다.
한줄기 빛조차 들어오지 않는 어둠 속에서 김 교수와 학생들을 자유롭게 해주는 것은 바로 소리다. 김 교수는 세상의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음성, 바로 그 말씀을 믿는다고 했다. “태초에 공허한 어둠 사이를 뚫고 ‘빛이 있으라’(창 1:3)는 하나님의 음성이 울려 퍼졌어요. 얼마나 아름다운 소리인가요. 만약 누군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음악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깊은 어둠에서 찬란한 빛을 만들어내신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비록 빛이 없을지라도 하나님 음성을 들을 수만 있다면 그 인생엔 빛이 비치고 나아갈 길이 보일 것입니다.”
김 교수는 시각장애인을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이 싫다고 했다. “앞을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빛을 모르는 사람일 뿐이니까요. 보이는 것 대신에 보이지 않는 것에 의지해 사는 이가 시각장애인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특별한 축복을 받는 사람이랍니다.”
그는 세계 7개국에서 온 20여명의 시각장애 음악 영재들에게 ‘특수음악 테크놀로지’를 가르친다. 보이는 사람들을 위해 컴퓨터로 악보를 그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수업이다. 시각장애인들이 전문적인 뮤지션이 되기 위해 꼭 배워야 하는 컴퓨터 기술을 전달하는 수업이기도 하다.
김 교수의 열정과 끈기는 시각장애인들에게 큰 희망의 빛이 되고 있다. 버클리음대 로저 브라운 총장은 “김 교수는 언어 장벽과 시각장애라는 이중고를 극복한 인간 승리의 주인공”이라면서 “헬렌 켈러를 가르친 설리번 선생님과 같은 아주 소중한 사람”이라고 자랑한다.
“결혼을 왜? 얼마나 힘든 줄 알아?
어머니의 기도 덕일까. 결혼은 김 교수 인생 최대의 사건이었다. “결혼을 왜 해? 결혼이 얼마나 힘든 건 줄 알아?” 그가 결혼한다고 하니 주변 사람들이 모두 겁을 주며 말렸다. 하지만 기우에 불과했다. 동갑내기 아내 티파니가 이해심 많고 타문화에 대해 포용적이고 긍정적이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인터넷 소개팅 프로그램으로 만나 4년 전 결혼에 골인했다. 티파니는 박사 출신 대학교수지만 비빔밥 요리를 잘하는 내조의 여왕이기도 하다.
김 교수는 자신이 오늘 이 자리에 서게 된 것은 가족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특히 동대전장로교회에서 새벽마다 기도하고 있든 어머니(장춘자·73)와 아버지(김기선·78)께 모든 공로를 돌렸다.
김 교수에게 지금 볼 수 있게 된다면 가장 보고 싶은 게 뭐냐고 물었다. 그는 아내 티파니의 손을 잡고 “악보가 보고 싶다고 하면 사랑하는 아내가 화내겠지요?”라면서 호탕하게 웃었다.
글·사진=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
[얼굴] 피아노, 어둠 속 빛이 되다… 미국 버클리음대 첫 시각장애인 김치국 교수
입력 2015-07-04 00: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