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 첫 소식 전해주시죠.” 변규리(26·여) PD가 이렇게 말문을 열자 이세린(22·여) PD가 다급하게 이어받았다. “구로구에도 첫 중동호흡기증후군(MERS·메르스) 환자가 나왔답니다. 주민 여러분 모두 건강 조심합시다.”
지난달 23일 서울 구로구 구로민중의 집 3층. 서울시가 지원하는 마을라디오 ‘구로FM’ 스튜디오에서 ‘우리 동네 안녕하니’라는 프로그램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10평 남짓한 공간에 큰 책상 2개를 붙인 스튜디오 곳곳에는 검은 전선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방음이 안 돼 스튜디오 밖 응접실까지 소리가 울리기도 했다.
열악한 환경이지만 두 PD는 연신 웃었다. 구로구의 학교물품 공동 구매와 구로공단 50주년 기념행사 소식을 놓고 15분가량 수다를 떨기도 했다. 한 주 동안 지역신문 구로타임즈를 보고 변 PD와 이 PD가 직접 고른 뉴스들이다.
2부 방송에선 ‘마을과 이주민 혐오’를 주제로 토론이 이어졌다. 구로구에는 가리봉동과 구로4동을 중심으로 4만5000여명의 이주민이 살고 있다. 이 PD는 “이주민을 사람이 아니라 기계로 생각하는 분이 많다”며 “방송을 듣는 분 모두 주변의 이주민들을 우리 주민으로 생각하자”며 방송을 마쳤다.
주민의, 주민에 의한, 주민을 위한
매주 2회 방송되는 구로FM의 ‘과녁’은 명확하다. 구로에 살거나 구로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이 청취자다. 방송을 제작하는 두 PD도 구로구에 있는 성공회대를 다녀 지역 사정을 잘 안다. 2013년 지역주민 8명이 십시일반 걷은 돈으로 방송 장비를 마련해 시작한 구로FM은 매달 공개방송을 열 만큼 규모가 커졌다. 처음엔 시큰둥했던 주민들도 ‘동네 이야기’에 흥미를 느끼고 큰 호응을 보내고 있다. 이 PD는 “청취자에서 진행자로 변신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며 “한 여성 주민이 나서서 육아 노하우를 전해주는 방송을 했는데 관심이 뜨거웠다”고 전했다.
팟캐스트 등 다양한 ‘1인 미디어’가 등장하는 시대에 마을라디오를 고집하는 이유는 뭘까. 이 PD는 “라디오를 통해 삭막해진 마을 분위기를 바꾸고 싶다”며 한 일화를 들려줬다. “어느 장애인복지관에서 방송에 출연하고 싶다는 연락이 왔어요. 찾아보니 스튜디오에서 불과 5분 거리에 있더라고요. 바로 건너편 이웃이었는데 지난 3년간 전혀 몰랐던 거죠. 이런 어색하고 황당한 상황을 없애자는 거예요.” 변 PD는 “공동체를 취재해서 거창한 무언가를 이루는 게 아니라 구로FM 자체가 공동체의 일부가 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구로FM을 비롯해 서울시가 지원하는 마을미디어는 현재 54개다. 2012년(46개)보다 조금 늘었다. 지원비도 같은 기간 5억원에서 6억9500만원으로 증가했다. 서울마을미디어지원센터 관계자는 “자신이 사는 마을에 대한 관심과 흥미가 늘고 있다는 증거”라고 말했다.
미디어를 넘어 마을공동체 지원도 이어지고 있다. 서울시는 2013년부터 우리마을지원사업을 시작해 마을활동 지원비로 최대 1500만원, 마을 사랑방 등 공간 지원으로 최대 5000만원까지 주고 있다. 지금까지 349개 풀뿌리 마을 활동이 혜택을 받았다. 올해는 48개 마을이 지원 대상으로 확정됐다.
주민이 만든 ‘징검다리’
주민과 지역 학교 교사 등이 직접 마을공동체를 만들기도 한다. 지난해 6월 27일 서울 강서구의 교사와 학부모들은 ‘징검다리 마을학교’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아이들을 제대로 가르치고 키우려면 어른부터 제대로 배워야 한다는 취지에서다. 작은 마을학교는 1년 만에 ‘학생’ 700여명을 모아 지역사회의 명물이 됐다.
출발점은 2012년 송화초등학교 김수정(50·여) 강은정(46·여) 이가은(42·여) 교사 등이 꾸린 작은 독서 모임이었다. 좋은 교육을 위해서는 어른부터 꾸준히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한 교사들은 2013년 겨울방학부터 본격적으로 ‘마을학교’ 만들기에 나섰다. ‘앞사람이 먼저 간 길을 뒷사람이 따라 건너는 징검다리가 돼야 한다’는 취지에서 학교 이름은 ‘징검다리 마을학교’로 했다.
6개월 준비 끝에 지난해 6월 13일 ‘징검다리 마을학교’ 네이버 밴드 모임을 만들고 회원을 모았다. 첫 강좌는 같은 달 27일 오후 7시 송화초교에서 열렸다. 교육 컨설턴트 한왕근씨를 불러 ‘아이를 살리는 교육, 망치는 교육’이란 제목의 강의를 했다. 이후 혁신학교, 에코맘 되기, 탈핵, 행복사회, 사교육과 공교육 문제, 아이와의 소통, 예술과 인문학 등 다양한 분야·주제를 다루는 강의가 14차례 이어졌다.
참가자들은 ‘학비’ 5000원을 그날그날 현장에서 낸다. 학비는 강사 섭외비, 부모님을 따라온 아이들 간식비 등에 쓴다. 이틀 안에 꼼꼼히 결산해 내역을 밴드에 공유한다. 마을학교는 10월까지 강의 일정이 빼곡하다.
마을과 학교를 연결해야
마을학교의 인기 비결은 뭘까. 교사들은 ‘갈증 해소’라고 본다. 학교마다 다양한 학부모 모임이 있다. 하지만 오로지 아이만을 위한 시스템 안에서 학부모는 그저 ‘누구 엄마’ ‘누구 아빠’일 뿐이다. 김수정 교사는 “기존 학부모 모임은 아이에 대한 단편적 얘기, 지역사회 ‘카더라 통신’을 나누는 데 그치기 쉽다”며 “아이를 조금이나마 다르게 키우기 위한 정보, 사는 지역에 대한 궁금증 등 학부모의 욕구를 채워줘 인기를 얻게 된 것 같다”고 분석했다.
마을학교가 정착하면서 교사와 학부모의 관계도 달라졌다. 김 교사는 “담임교사와 학부모로 만날 때는 중간에 아이가 있다 보니 서로 조심스러웠는데 이제는 부담감이 사라져 서로의 생각을 자유롭게 나눌 수 있다”고 했다. 마을학교를 찾는 아빠가 늘어나는 것도 기분 좋은 변화다.
징검다리 마을학교 교사들은 ‘학교’보다 ‘마을’에 무게를 둘 때 입시 위주 교육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본다. 마곡중 김승규(57) 교사는 “학교야말로 도시의 삭막함 속에서 흩어진 공동체 문화를 살리는 실마리가 될 수 있는 공간”이라고 강조했다.
‘마을학교’는 인근 지역으로 점차 확산되고 있다. 징검다리 마을학교 소문을 들은 양천구와 관악구 교사들의 문의가 부쩍 늘었다. ‘마을’의 따뜻함이 삭막한 교육 현장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는 실험은 유쾌하게 퍼지고 있다.
박세환 전수민 고승혁 기자
foryou@kmib.co.kr
[마을공동체 실험] ‘동네방송’으로 가까워지고, 함께 배우며 벽 허물고… 新마을, 이웃을 잇다
입력 2015-07-04 02: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