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무리한 수사로 장애인·미성년자 절도범 몰아…“사회적 약자인 피의자 인권 소홀”국가 배상 판결

입력 2015-07-03 02:54
“아는 형들 쭉 말해봐.”

2009년 7월 경기도 광명시의 한 아파트 단지. 지난 1년간 이 일대에서 비슷한 수법의 절도 사건이 40여 차례 발생하자 경찰이 수사에 나섰다. 당시 광명경찰서 수사관들은 동네 비행청소년을 대상으로 탐문했다. 이 과정에서 고등학생 A군(당시 16세)과 지적장애를 앓고 있던 B군(당시 19세)의 이름이 한 청소년 입에서 나왔다.

경찰은 이들을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했다. 범인의 모습이 흐릿하게 찍힌 CCTV 영상을 근거로 A군과 B군을 긴급체포했다. 두 사람 모두 처음에는 범행을 부인했지만 수사관의 추궁에 결국 “범죄를 저질렀다”고 자백했다.

자백을 받은 경찰은 대담해졌다. 체포 다음 날 두 사람을 대상으로 현장검증을 실시했다. 경찰은 포승줄에 묶인 A군과 B군에게 범행 과정을 재연하게 하면서 마스크나 모자조차 씌우지 않았다. 경찰이 이들의 자택에서 압수한 절단기, 시계, 만보기 등 증거물은 범행과 무관한 걸로 밝혀졌다. 두 사람의 지문과 족적(足跡)도 현장에서 발견된 것과 달랐다. 하지만 경찰은 “총 44건의 절도범죄를 저질렀다”며 이들을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

재판에서 A군과 B군의 결백이 밝혀졌다. 1심에서 통신내역, 학교 출결상황 등을 조회한 결과 이들이 범행 시점에 그 현장에 없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범행을 입증할 증거도 인정되지 않았다. 1심 재판부는 이들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검찰은 대법원 상고까지 했지만 모두 기각됐다.

서울중앙지법 민사37단독 최정인 판사는 A군, B군과 그 가족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했다고 2일 밝혔다. 최 판사는 “경찰이 예단된 범죄사실에 맞춰 성급하고 무리하게 수사를 진행했다”며 “수사기관은 피의자의 인권을 존중해야 하고, 특히 피의자가 장애인, 미성년자 등 사회적 약자일 때는 부모 등을 동석시켜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도록 배려할 의무가 있다”고 판시했다. 다만 이들이 지난해 2월 형사보상금을 지급받은 점을 고려해 위자료는 총 900만원으로 결정했다.

양민철 기자 liste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