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무리 세찬 세상의 바람에도 가만히 견디어낼 뿐입니다.”
마흔 넘은 노처녀 ‘문자’는 지금 세상에선 섣불리 이해하기 어려운 캐릭터다. 한마디로 지지리 궁상의 삶이다. 10년째 출판사 말단 사원으로 지내면서 악착같이 돈을 모으지만 변변한 옷 한 벌 없다. 뒤에서 자신을 향해 수군대는 사람들의 소리엔 침묵으로 외면한다. 사생활도 다를 바 없다. 10년간 만난 국회의원 보좌관 출신의 유부남 한수는 출세의 길을 걷자 문자를 버렸다. 딸도 한수에게 빼앗겼다. 정권이 바뀐 뒤 갈 곳 없게 된 한수가 돈을 요구할 때는 친척들의 비난을 받으며 손을 벌린다.
문자는 고된 자신의 삶을 낙타에 빗댄다. 고통의 사막에서 악착같이 견뎌내는 동물이 낙타다. 낙타가 열사의 땅에서 갈증을 견딜 수 없는 마지막 순간 등의 기름을 물로 바꾸며 생명의 오아시스를 향해 걸어가듯 문자는 자신의 주변에서 주는 고통을 묵묵히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들을 더 사랑하는 것이 최고의 복수라며 스스로를 위로한다.
1983년 5월 ‘한국문학’에 발표된 서영은의 단편소설 ‘먼그대’ 속 주인공 문자가 배우 윤석화를 통해 무대에 세워졌다. 서울 마포구 산울림극장에서 5일까지 공연되는 동명의 1인극 ‘먼그대’를 통해서다. 홀로 무대에 오른 윤석화는 문자의 삶을 절절하게 보여줬고, 그 모습에 사람들은 울었다.
다른 때 같았다면 문자에게만 집중했을 텐데 강렬한 기억을 남긴 다른 존재가 있었다. 낙타다. 낙타에 꽂힌 건 다른 이유에서였다. 2015년 대한민국에서 ‘낙타’는 기피의 대상이 됐다. 메르스 때문이었다. 낙타를 통해 메르스가 전파됐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전국의 동물원에 있던 낙타 46마리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 바이러스를 옮긴 나쁜 녀석이 됐다. 중동 지역이 아닌 한국과 호주에서 나고 자랐음에도 모두 격리조치됐다. 혹독한 시간을 낙타는 악착같이 버텼다. 검사 결과는 음성이었다.
지난 6월 한 달간 대한민국 국민들도 낙타처럼 고통의 사막에 있었다. 메르스라는 이름의 사막이었다. 끝을 알 수 없는 사막이었다. 초기 대응에 실패한 정부, 변명만 늘어놓는 대형 병원들 때문에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됐지만 어느 누구도 책임지겠다고는 하지 않았다.
그렇게 갈증을 견딜 수 없는 마지막 순간 대한민국 국민들은 자발적으로 기름을 물로 바꾸는 노력을 하기 시작했다. 최근 충북 청주의 한 5층짜리 건물에 세 들어 있는 7명의 세입자들은 집 주인으로부터 한 통의 문자를 받았다. “메르스 여파로 어려움을 겪는 분들을 위해 이달 월세는 반값만 받겠다”는 내용이었다. 집 주인은 더 많이 내려주지 못한 것을 미안해했다.
집단 지성도 힘을 발휘했다. 정부가 정보를 공개하지 않을 땐 메르스 감염 지도를 시민이 직접 제작해 대중에게 알렸다. 카카오톡, 페이스북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각종 예방법을 주고받았고 국민 모두가 힘을 모아 이기자는 메시지도 확산됐다. 버스터미널의 계단 손잡이 등에 알코올 소독제를 뿌리기 위해 자원봉사에 나선 사람들도 있었다.
“…고난이 축복이 되기 위해 더 높은 곳으로 멀어지는 신의 등불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 빛에 도달하고 싶은 자유의 열렬한 갈망으로 온몸이 또다시 갈기갈기 펄럭입니다.”
문자는 고통을 구원으로 승화시키는 삶을 살겠다는 메시지를 마지막으로 던졌다. 대한민국 국민도 끝없는 사막을 보며 절망하고 원망하는 대신 스스로 희망을 찾았다. 고통의 사막을 걸어가 마침내 오아시스를 만났던 낙타처럼….
서윤경 문화체육부 차장 y27k@kmib.co.kr
[세상만사-서윤경] 고통의 사막을 건너는 낙타
입력 2015-07-03 00: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