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 해외근무를 위해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떠났다 귀국한 친구를 최근 만났다.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 화젯거리가 수학으로 옮겨졌다. “중학교 2학년인 딸이 미국에서는 ‘수학 영재’라고 불렸는데 한국에 오니 ‘수포자(수학포기자)’가 돼 버렸다. 과학자가 되고 싶어 수학을 정말로 좋아했던 아이였는데…”라며 한숨을 푹 쉬었다.
그의 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전후 사정은 이랬다. 미국에서는 수학을 배워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가 등을 반복적으로 가르치면서 흥미 유발에 중점을 둔다고 한다. 확률, 도형, 함수, 미적분 등이 우리 생활에서 어떻게 쓰이는지 알게 하고, 수학에서 배우는 개념들이 얼마나 다양한 분야에 접목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몸소 체험하게 한 뒤 스스로 깨닫게 도움을 주는 방식이다.
하지만 한국은 달랐다. 너무 많은 걸 빨리 미리 배우도록 무작정 끌고 갔고, 지식·암기·문제풀이 위주로 진행됐다. 수학의 지식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개념의 벽도 높았다. ‘무리수(irrational number)’ ‘유리수(rational number)’ ‘기수(cardinal number)’ ‘서수(ordinal number)’…. 분명 한국말인데 평소에는 쓰지 않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 천지였다. 영어로 보면 고개가 끄덕여지는데 말이다. 시간을 갖고 재미있게 접근하는 ‘실험 수학’에 익숙했던 아이로서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고 그래서 아예 수학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은 여러 조사에서도 입증된다. 교육시민단체 ‘사교육 걱정 없는 세상’이 2013년부터 미국·일본·싱가포르·영국·독일·핀란드와 한국의 초·중학교 수학 교육과정 및 교과서를 비교 분석해 봤더니 우리 학생들이 수학을 적은 시간에 많이 배우는 것으로 나왔다. 공부할 양만 따져보면 필즈상(수학 노벨상) 수상자를 다수 배출한 이들 6개국보다 초등학교는 27%, 중학교는 29%가 더 많았다. 주요 단원의 학습 시기도 우리가 1∼2년 빨랐다. 반면 같은 개념을 가르치는 데 들이는 시간은 적었다. 한국은 피타고라스 정리를 중3에서만 다루지만 미국은 7학년(한국의 중1)과 9학년 교과서에 나온다. 미국에서 두 개 학년에 걸쳐 배우는 과정을 우리는 한 학년에 끝낸다. 한번 개념을 놓치면 다시 따라갈 수 없는 단선형 구조다. 6개국의 나선형 구조와 비교된다. 결국 ‘더 빨리, 더 많이, 더 어렵게’가 ‘수포자’를 양산하는 주범이라는 것이다.
요즘 수학에 대한 관심은 그 어느 때보다 지대하다. 2018학년도 수능부터 영어영역에 절대 평가가 도입되면서 더욱 그렇다. 수학이 유일한 변별력 테스트 과목이 됐기 때문이다. ∑, log, ∫, √, lim 등. 어른이 된 뒤 왜 이것 때문에 그렇게 속을 썩이고 힘들어했을까 웃음 짓지만, 지금 학교 현장에는 웃음이 사라진 지 오래다. ‘수학=잠자는 시간’ ‘수학 포기=명문대 포기→인생 포기’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이 대열에 끼지 않기 위해 초등학생이 선행학습으로 미적분을 배우는 이상한 시대가 아닌가.
이런 점을 뒤늦게 인식한 교육부는 2018학년도부터 적용될 새 교육과정(문·이과 통합형 교육과정)의 수학 학습량을 20% 정도 줄이겠다고 지난 2월 선언했다. 하지만 1일 발표된 ‘개정 수학 교육과정 시안’을 보면 내용의 상하좌우 이동과 약간의 삭제만 있을 뿐 딱히 달라진 것이 없다. 오죽했으면 현장 교사들이 ‘눈 가리고 아웅’ 식 시안이라고 비판했겠는가. 이번 교육과정은 오는 9월 확정돼 고시될 예정이다. 남은 기간 현장의 목소리에 더욱 귀 기울여 최선의 방안을 도출해내야 한다. 해야 한다면 즐길 수 있는 통로를 조금이라도 열어줘야 한다. 그것이 ‘수포자’ 양산을 막는 길이다.
김준동 논설위원 jdkim@kmib.co.kr
[여의춘추-김준동] 수포자(수학포기자)를 구출하라!
입력 2015-07-03 00: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