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보령시 남포교회 김상욱(47) 목사 얘기다. 그는 10년째 이곳에서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골 3:16)도록 양무리를 이끌고 있다.
면소재지 130여 가구 주민 90%가 한 교회 교인. 남포교회는 지금도 가가호호를 향해 새벽 차임벨을 울린다. 주민 다수가 교인이 아니고선 힘든 일이다. 마을은 교회를 중심으로 밀레의 ‘만종’ 작품을 보는 것처럼 평화롭고 은혜가 넘친다.
남포교회는 보령시 남포면 읍내리 179번지에 위치한다. 도로명으로 남포읍성 1길 44이다. 보령시 관문 대천역에서 6㎞ 남짓 떨어진 전형적인 면 단위 시골교회다. 하지만 보령시내가 가깝다 보니 교육, 소비생활 등이 시내로 빨려들어가 한때 읍치 남포읍성의 위세(位勢)는 옛얘기가 됐다.
그럼에도 이 마을은 ‘주께 합당’한 ‘예수 행복동’이다. 세상살이가 호락호락하지 않으므로 세상 속의 분쟁과 시기가 없을 리 없지만 예배당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하나님의 의가 아닌 자신의 의였음을 회개하는 하나님의 공동체인 것이다.
단 한 번의 분쟁도 없는 ‘행복동’ 교회
지난달 30일 행복동 주민이 교회에 모여 신앙생활을 얘기했다. 문이혁(86) 박영규(80) 이송자(78) 김광자(72) 명예권사, 이상인(74) 원로장로, 최병동(60) 시무장로, 안근수(59) 권사, 서승숙(47) 사모 등이었다. 박 권사가 “옛날얘기 하니 참 재미지네요”라며 말보따리를 풀어냈다. 박 권사는 이곳에서 태어나 할머니 품에 안겨 교회를 다녔다. 평생 남포를 떠난 적이 없다.
이들은 이날 서로 ‘맞아 맞아’ 하며 호응하고, 박수치고, 끄덕이고, 갸우뚱하고, 이해하고, 아쉬워했다. 환한 미소가 이들의 또 다른 언어였다. 반평생 이상을 같이한 교우들이기에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었다.
누구네 집 자녀들은 어떻게 축복 받았고 누구 집은 몇 대째 신앙가문이라고 귀띔하기도 했다. 애기 손·발톱이 다시 나도록 사시다 천국 간 원로권사, ‘예수와 결혼’한 처녀 권사 얘기도 있었다. 손·발톱이 새로 난 이는 3년 전 소천한 김순금(작고 당시 106세) 명예권사다. 처녀 권사님은 20대에 ‘예수와 결혼’을 선언하고 지난해까지 이 교회 중고등부를 이끌던 곽선옥(74) 권사다.
남포교회는 20세기 초 미국 남장로교 군산선교부를 통해 복음의 씨앗이 심어졌다. 북상 순회 선교하던 선교사들이 해안에 상륙해 만나는 이들에게 쪽복음을 전했다. 선교사 부인으로 추정되는 ‘뚜부인’이 교회 설립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전언이다.
그 후 남포읍성 백성은 ‘스스로 그렇게 된(自然)’ 예수공동체가 됐다. 이들은 1919년 이전 남포읍성 읍내리 이방환씨 집에서 가정예배를 올렸다. 최, 조, 전, 차, 강씨 성을 가진 이들과 함께였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3·1만세운동으로 한반도 전체가 일제로부터 사슬을 끊고자 일어났던 그해 3월 이 옛 성읍 동문 밖에 초가 3칸짜리 공식 예배당이 마련된다. 이것이 열에 아홉이 교인인 ‘예수 행복동’ 탄생 배경이다.
“제가 정말 놀랍다고 생각한 건 교회 역사 이래 단 한 번의 분쟁이 없었다는 거예요. 좁게는 남포지역, 넓게는 보령의 모교회 역할을 하면서 사현교회 화덕교회 등 여섯 교회를 분립했고, 인근 10여 교회를 이끌었어요. 단 하나도 다툼에 의한 교회 설립이 없었습니다. 구역 분립이었죠.”
김 목사가 사료와 구술을 통해 교회 역사를 정리하면서 느낀 소감을 말했다.
한국 교회는 교인과 목회자가 자기 의를 내세우다 분열과 다툼으로 이어진 경우가 잦았다. 그러나 적어도 남포교회만은 역사 이래 하나였다. 일제 강점기, 6·25한국전쟁, 1950·60년대 장로교 분열, 70·80년대 교회의 폭발적 증가 과정에서도 그들은 늘 일치했다.
이상인 장로의 말.
“제가 어렸을 때 부활주일에 흰 옷 입고 거리에 나선 이들 모두 우리 교회 교인들이었어요. 말끔하게 차려 입고 예배에 참석했거든요. 우리는 우리 부모들이 그랬던 것처럼 교회에 들어서면 모든 감정을 내려놔요. 한 마을에 살다보니 왜 감정 충돌이 없겠어요. 하지만 그것을 이유로 교회 출석을 어기는 경우는 없었어요. 장의자에 떨어져 앉더라도 반드시 출석해 교회 형제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죠.”
이러한 전통은 지금도 ‘잠시 미운 사람과 주일 예배시간 떨어져는 앉아도 그 미운 마음을 다음 주까지 가져가지 않는다’는 ‘남포교회 불문법’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것이 90% 복음화율을 자랑하는 남포읍성 교인들의 자부심이다.
박종화 목사 아버지 5형제 모두 목회자
남포교회는 ‘네 상에 둘린 자’(시 128:3)가 재적 130여명, 출석 100여명이다. 노년 대 비노년 비율 6대 4로 여느 농촌교회와 달리 조화를 이루고 있다. 20여명의 성가대원, 30여명의 주일학교 및 10여명의 중고등부 학생은 100년의 미래다.
최 장로는 “시내(대천동)에 사는 자녀들이 주일이면 모교회로 출석해 성가대에 서고, 손주들은 주일학교나 중고등부 예배를 본다”며 “어려서부터 동네 사람 모두 교인이었고 교회와 마을이 하나라는 인식 속에 자라서 그런지 자부심이 대단하다”고 말했다.
이들의 자부심은 훌륭한 목회자가 많은 데서도 알 수 있다. 기독교장로회와 범장로회를 이끈 강상숙 박준철 유영소 김윤경 강요섭 박기수 등 20여명의 목회자를 배출한 교회이기 때문이다. 현 서울 경동교회 박종화 목사와 그 동생 박승화(작고·서울 송암교회) 목사도 이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성장했다. 특히 박 목사의 아버지 박준철 목사의 5형제, 즉 형 준필, 동생 준상 준기 준홍 등이 모두 목회자였다.
50·60년대 ‘거지대장’으로 불리며 훗날 사회복지 시설을 세워 구제에 앞장섰던 백영규 (전북 완주 원암수양원 이사장) 당시 전도사도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는 60년대 재임 당시 보령 및 충남 서해안 인근 부랑자들을 끌어모아 교회 안에서 먹이고 입혔다. 요즘으로 치자면 노숙인 선교였던 셈이다. 그때 남포교회는 부랑인 선교를 위해 예배당과 마을 고구마 저장굴을 사용했다. 저장굴을 기도굴로 만든 것이다. 지금은 그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이렇듯 교회의 나눔정신은 후대 목회자와 교인 등에게 많은 영향을 끼치며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6·25 당시 예배당 인민위 사무실로
남포는 1914년 군·면 통폐합 이전 현청과 군청이 있던 읍성이었다. 읍성은 고려시대 축성됐으며 동·서·남문 등이 옹성으로 되어 있어 왜구 등이 감히 접근하지 못했다. 1895년 고종 때 현에서 9개면을 관할하는 군이 됐으나 일제 강점기 보령군에 편입되면서 급격히 쇠락했다. 더욱이 1931년 장항선이 개통되면서 보령 대천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상권으로 옛 고을 명맥만 남게 됐다.
남포교회는 세워질 당시만 해도 충남 중부 해안의 선교 거점이었다. 그리고 6·25 한국전쟁 때는 예배당을 인민위원회 사무실로 내주는 어려움도 있었다. 그런 속에서도 “인민군의 감시를 피해 교인들 집에서 가정예배를 드렸다”고 문 권사가 회상했다. 전쟁이 끝나고 성도가 급격히 늘었다. 그들은 지금의 읍성 동문 밖에 새 예배당을 지었다.
남포교회당 배경을 이루는 옥마산과 성주산은 근대화 시대 석탄산업의 중심이었다. 장항선 남포역은 성주탄광을 잇는 철도 옥마선 시발점이었다. 이 석탄산업으로 남포도, 남포교회도 한때 부흥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폐광되어 보령석탄박물관 등으로 쓰인다. 이상인 장로는 그 탄광에서 일했다. 집하된 석탄을 각 지방 연탄공장에 나눠 출하하는 계장 직책이었다. 권한이 막강했다. 연탄공장 사장들이 그에게 잘 보이기 위해 돈을 찔러주던 시절이었다.
그의 성품을 잘 아는 교인들은 이날 “당시 부정부패가 만연한 때라 이 장로님이 맘만 먹으면 큰 부자 됐을 것”이라고 농담을 건넸다. 그들은 “우리 남포 교인들은 자신이 무슨 일에 있든지 성경에 어긋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교회에서 배웠다”고 말했다. 이 장로는 “그런 부정행위를 한다는 것은 교인으로서 창피한 일”이라고 짧게 말했다.
“교회에서 배운 대로 사회생활”
충남 서천, 보령 지역은 충남 여느 지역과 달리 기독교장로회 교회 수가 월등하다. 미 남장로회 군산선교부 영향이 컸기 때문이다. 남포면에 20여개 교회 중 10여개가 기장교회다. 따라서 기장 특성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남포교회는 구제와 투명성 문제에 남다르다. 그러면서도 기도굴에서 성령의 거하심을 간구하는 교회다.
남포교회는 2019년 설립 100주년을 앞두고 있다. 조선 세조 때 문신 이승소는 이 남포읍성을 두고 “만고의 외로운 옛 성이 있는데 바깥 바다와 안의 산이 웅장하다”고 노래했다. 이제 ‘영혼 구제 100년의 복음’은 남포읍성 복원과 함께 ‘문화 및 영성 선교 100년’을 웅장하게 준비하고 있다.
보령=글·사진 전정희 선임기자
jhje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