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찾아서… 할아버지·주부·대학생 “나도 배우다!”

입력 2015-07-01 02:40 수정 2015-07-01 09:41
서울 성북구 ‘행복한 정릉 창작소’에서 지난달 1일 열린 ‘정릉연극교실’ 첫 수업에 참석한 주민배우들이 몸으로 ‘시장(市場)’을 표현하고 있다. 수업을 시작할 때 굳어 있던 얼굴은 금세 환하게 밝아졌다. 성북문화재단 제공

“여러 사람의 지혜를 모아 남의 마음에 기쁨과 슬픔을 주고 내 마음에도 변화를 가져오는 게 연극이라고 생각해요. 난 배우가 되고 싶었어요. 할아버지가 ‘딴따라는 상놈’이라고 못하게 했지만.”

‘정릉연극교실’ 첫 수업이 열린 지난달 1일 오후 서울 성북구 ‘행복한 정릉 창작소’. 회색 베레모를 살짝 눌러쓴 노인이 수줍게 입을 열었다. 그는 연극배우가 되려고 대학시절 연극동아리에서 활동했는데 할아버지의 반대로 공무원 길을 걸었다고 했다. 백발이 돼서야 다시 꿈의 문턱에 선 이장재(80)씨 얼굴엔 설렘이 가득했다.

이날 연극수업에 참석한 남자 중 최고령인 이씨는 “연극에 할아버지 역할도 필요할 텐데 난 분장할 필요도 없다. 여기선 골동품 질그릇처럼 나이든 사람도 받아준대서 왔다”며 환하게 웃었다. 이어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새로운 세계를 살겠다”며 자기소개를 마쳤다.

성북문화재단은 지난 4월 27일부터 한 달 동안 4개의 연극교실(정릉·한양도성·의릉·미아리)을 열어 주민배우 134명을 모집했다. 2013년부터 지난해까지 서울시에서 하던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자 올해부터 성북문화재단 등 6개 기관이 각각 본격적으로 운영에 나섰다.

행복한 정릉 창작소의 15평 남짓한 공간에 이씨 같은 주민배우 20명과 강사 5명이 모였다. 참가자의 나이와 사연은 제각각이다. 하지만 모두 ‘꿈’과 ‘자아(自我)’ 같은 단어에 매혹돼 이곳의 문을 두드렸다.

참가자 중에는 정릉 토박이가 많았다. 김분선(59·여)씨도 정릉에서만 33년을 살았다. 김씨는 “부산에 살 때 KBS 성우에 지원했다가 목소리는 합격점이었는데 연기가 부족해 탈락했다. 포스터 보고 그때 생각이 나서 지원했다”고 말했다. 여자 최고령자 양숙정(77·여)씨는 “초등학교 교사를 하다 은퇴한 뒤 연극하는 남동생 영향으로 8년 전 연극을 시작했다”고 했다. 이미 지난해 성북구 주민센터 실버연극 ‘경로당의 전화사건’에서 주인공을 했었다.

서울의 ‘동네 연극교실’은 2013년 ‘나를 찾아가는 연극여행’ 등 3개 반에서 110명으로 시작했다. 지난해에는 ‘연기, 내 삶의 주인공이 되는 기술’까지 9개 반 230명이 참여했다. 올해 6개 기관의 통합 참여인원은 397명이나 된다.

장경미(49·여)씨는 이사 온 지 3개월째인 ‘정릉 새내기’였다. 연극영화과에 진학하는 게 꿈이었는데 결국 이루지 못하고 결혼 후 남편과 자식만을 위해 살아왔다고 했다.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공허해질 것 같아 이제 내 자신을 찾으려 한다”고 덧붙였다.

‘길을 찾는 청춘’도 함께했다. 서울 온 지 6개월 된 연기지망생 유재훈(26)씨는 “다시 처음부터 하고 싶어서 왔다”고 소개했다. 장호(27)씨는 “제대한 지 한 달 반인데 곧 서른이더라. 하고 싶던 걸 더 미룰 수 없어 용기를 내 지원했다”고 말했다. 대학생 김도래(19·여)씨는 “연극도, 삶도 배우고 싶다”며 인생 선배들의 자기소개에 귀를 기울였다.

자기소개를 마친 배우들은 행복한 순간을 연기로 표현하는 등 감정을 몸으로 보여주는 첫 수업을 마쳤다. 세 시간이 지나자 긴장이 묻어나던 배우들 얼굴에 ‘드디어 연극을 한다’는 즐거움이 비쳤다. 모임을 마치기 전, 동그랗게 모여 손을 잡고 첫 모임의 소감을 한마디씩 말했다. “두근두근했습니다.” “젊어졌습니다.” “행복했습니다.”

정릉연극교실은 매주 월요일 오후 2시 문을 열고 연습을 한다. 10월에 30∼40분짜리 ‘탐방연극’을 완성할 계획이다. 책임강사를 맡은 전은정(45·여) 극단 ‘갖가지’ 대표는 30일 “주민 탐방연극은 지역 예술가와 주민들이 함께 찾아낸 동네 역사·이야기로 연극을 만들어 시민들에게 알리는 것”이라며 “태조 이성계, 신덕왕후 등 정릉을 알릴 수 있는 소재를 발굴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전수민 김판 기자 suminis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