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프라스, 그렉시트 시한폭탄 안고 국민투표 승부수

입력 2015-06-29 02:38
알렉시스 치프라스 그리스 총리가 28일(현지시간) 아테네 국회에서 연설을 앞두고 손목시계를 쳐다보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27일(현지시간) 그리스 수도 아테네 시내의 한 현금자동인출기(ATM) 앞에 현금을 찾으려는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다. 이날 그리스 전역에서 30% 이상의 ATM에서 현금이 바닥난 가운데 유럽중앙은행(ECB)의 긴급 유동성 지원이 없을 경우 일부 그리스 은행이 29일 문을 열지 못할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AFP연합뉴스
그리스 시민들이 27일(현지시간) 새벽부터 현금자동인출기(ATM) 앞에 길게 줄지어 섰다. 알렉시스 치프라스 그리스 총리가 공영방송 ERT를 통해 “7월 5일 채권단의 구제금융 협상안에 대한 국민투표를 실시하겠다”고 발표한 직후였다. 은행 관계자들은 “이날 오전 그리스에 있는 전체 ATM의 35%인 2000개 이상의 기기에서 현금이 바닥났다”고 로이터 통신에 말했다. 이날 그리스에서는 현금 6억 유로(약 7500억원)가량이 인출된 것으로 파악됐다.

치프라스 총리가 구제금융 찬반 국민투표를 발표하면서 채권단과의 구제금융 협상이 사실상 종료됐다. 유로그룹이 “국민투표 때까지 구제금융을 연장해 달라”는 그리스의 요청을 거부함에 따라 30일로 구제금융은 끝난다. 그리스의 디폴트(채무불이행) 우려는 더 커졌다.

AP통신 등은 그리스 의회가 28일 정부가 상정한 구제금융 협상안을 국민투표에 부치는 안건을 의결했다고 전했다.

치프라스 총리는 “채권단의 긴축 압박은 그리스를 느린 죽음으로 이끌 것”이라며 “국민투표의 목적은 협박을 받는 대신 명예로운 합의와 실현 가능한 해법을 찾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리스는 27일 유로그룹 회의에서 채권단이 제시한 120억 유로(약 15조600억원)를 지원하는 구제금융 프로그램 5개월 연장안에 대해 “정부 부채만 증가시키고 연말에 더 가혹한 각서를 요구하게 될 것”이라며 거부했다.

치프라스 총리의 도발로 그리스 앞날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게 됐다. 그리스는 당장 30일 IMF 채무 15억 유로(약 1조8800억원)를 갚아야 한다. IMF는 회원국의 상환 실패를 디폴트가 아닌 ‘체납(arrears)’으로 규정하고 있지만 결국엔 연쇄 지급불능으로 디폴트에 이를 가능성이 크다. 디폴트는 그리스의 유로존 탈퇴를 가속화시킬 수 있다.

다만 유로존 재무장관들은 “유로존 회원국인 그리스의 이익을 위해 다시 회의를 재개할 준비가 됐다”면서 그리스의 유로존 탈퇴는 막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구제금융 협상안에 대한 국민투표 결과를 속단할 수 없지만 이날 그리스 일간 카티메리니는 긴급 설문조사 결과 채권단의 협상안에 찬성한다는 답변이 47.2%, 반대는 33%로 조사됐다고 전했다. 여론조사대로 투표 결과가 나온다면 당장의 위기는 잠재울 수도 있다. 다만 이 경우 급진좌파연합(시리자) 주도의 연립정부가 실각하는 등 정치적 혼란이 예상된다. 국민에게 반대표를 던지라고 촉구한 치프라스 총리에 대한 사실상의 불신임이 되기 때문이다. 치프라스 총리 사임과 조기총선 실시가 뒤따를 것으로 전망된다.

현지 언론들은 30일로 구제금융이 이미 끝난 상태에서 5일 실시되는 국민투표가 실효성이 있는지에 대한 논란이 일고 있다고 전했다. 미칼리스 스타토풀로스 전 법무장관은 일간 프로토테마에 “헌법에서 재정문제를 국민투표에 부치는 것은 허용하지 않고 있다”면서 “채권단이 수정 제안을 하면 다시 국민투표를 치를 것이냐”고 지적했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IMF 총재는 영국 BBC방송에 “법적으로 말하자면 그리스의 국민투표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제안과 협상에 대한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예룬 데이셀블룸 유로그룹 의장은 그리스 국민투표 결과 채권단의 협상안을 찬성하는 결과가 나오면 어떻게 되느냐는 질문에 “그 질문은 그리스 정부에 해야 한다. 나는 대답할 수 없다”고 말했다.

임세정 기자 fish813@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