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母子가 함께 한국선교 문 연 스크랜턴] (13) 감리교 최초 한국인 목사

입력 2015-06-30 00:31
1910년 당시 동대문교회 주변 모습. 오른쪽은 1903년 어머니 메리 스크랜턴의 병환을 돌보기 위해 미국으로 돌아간 윌리엄 스크랜턴이 연회 참석자들을 위로하고 안부를 묻는 편지. 이덕주 교수 제공

상동교회가 새 예배당 건축을 계기로 급속한 부흥과 성장을 이룩한 것과 달리 서대문 밖(애오개) 아현교회와 동대문교회는 상대적으로 침체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나마 동대문의 경우는 여선교사들과 전도부인이 명맥을 잇고 있었다. 여성들이 주로 활동하다보니 남성교인이 접근하기 어려운 측면도 있었다. 이에 윌리엄 스크랜턴은 서점을 내고 전도인을 상주시켜 남성 사역을 활성화할 뜻을 세웠다. 동대문 안 종로 거리에 마련한 서점을 ‘거리 전도소’로 활용해 주민과 손님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는 것이 계획이었다.

한국인 최초 목사 배출

서점 전도소 토착 전도인으로 고시형이 선발됐다. 그는 조선 후기 천주교도 박해 때 희생당한 순교자의 후손이었다. 그는 스크랜턴의 지도로 상동교회 교인이 됐고 1900년 연회에서 권사 1년 급으로 인증을 받은 교회 지도자였다. 또 배재학당 출신으로 정동교회 교인인 이경직도 함께 사역했다. 그 역시 1901년 연회에서 권사 1년 급 인증을 받았다. 이들은 장차 목사가 되기 위해 신학회에서 공부하는 신학생들이기도 했다.

스크랜턴은 이들 토착 신학생 전도인을 동대문에 상주시켜 동대문교회와 지역 선교를 활성화시키려고 했다. 그의 이런 생각은 적중했고 연이어 남성 전도인들이 배치되면서 동대문교회의 교세도 자연스럽게 늘어났다. 이런 결과로 1909년 12월에는 미 감리회 기금을 지원받아 지하실을 갖춘 2층짜리 벽돌 예배당을 신축할 수 있었다.

당시 스크랜턴은 토착 목회자 양성을 위한 신학 교육 과정인 ‘신학회’를 달성회당에서 개최했다. 신학회는 아펜젤러가 1887년 배재학당 학생들에게 성경과 교리 공부를 시킨 ‘신학부’ 수업에서 유래하는데 1898년부터 신학회로 그 명칭을 바꾸고 매년 겨울 농한기를 이용해 2∼3주 간 집중 신학교육을 실시했다. 1900년 11월 개최된 신학회에서는 선교사 노블이 ‘영혼의 이치’를, 존스 선교사가 ‘성교회사기(聖敎會史記)’, 스크랜턴이 ‘성경 시작’이라는 과목을 강의했다. 수강생 대부분은 지역 교회에 속해 전도활동을 하던 현직 전도자들이었다. 이렇게 신학회 수업을 받은 학생 중 김창식과 김기범이 1901년 5월 연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감리교 선교사회는 인력난을 겪고 있었다. 토착 교인들의 신앙 열정은 높았지만 이를 충족할 선교사들은 부족했다. 스크랜턴은 미국 선교부에 선교사 추가 파송을 요청했지만 반응은 미온적이었다. 그래서 마련한 대안이 토착 전도자들에게 목사 안수를 시행하는 것이었다. 토착 전도인들에게 안수를 줌으로써 부족한 목회 인력을 보강하고 교회의 연대의식도 고취할 수 있었다.

당시 감리교 목회자는 사역 형태에 따라 ‘순행 전도사’와 ‘본처 전도인(local preacher)’으로 나누었는데 순행 전도사는 신학 과정을 마친 후 감독의 파송을 받아 여러 교회를 순회하며 목회하는 목회자이고, 본처 전도인은 신학을 하지 않았으나 한 곳에 정착해 목회하는 목회자를 의미했다. 안수를 받은 목사의 성품(聖品)은 기능에 따라 ‘집사목사(deacon)’와 ‘장로목사(elder)’로 구분했는데 장로목사는 성례를 집행할 수 있지만 집사목사는 성례 집전이 불가능했다. 이런 장정규칙에 따라 1901년 목사 안수를 받은 토착 전도인의 목사 성품은 ‘본처 집사목사(local deacon)’였다.

안수는 1901년 5월 14일 연회 마지막 날 평양삼화교회 김창식 전도사와 인천내리교회 김기범 전도사가 받았다. 이들은 모두 5년 넘게 선교사와 함께 전도와 목회에 힘썼으며 신학회 수업도 빠지지 않고 참석해 선교사들로부터 신뢰를 받았다. 안수는 스크랜턴과 존스, 노블 등의 보좌로 당시 연회에 참석한 무어 감독이 시행했다. 이로써 주종관계로 인식됐던 선교사와 한국인 목회자 사이의 관계는 동역관계로 발전했다.

스크랜턴은 내친 김에 당시 한국 감리교회의 직제와 조직도 개편했다. 선교 지역을 남부와 북부, 서부지방 등 3개로 나누고 스크랜턴과 노블, 존스를 각 지방 ‘장로사’로 임명했다. 무어 감독은 한국감리교회 전체를 총괄 지휘할 감회사(superintendent)로 스크랜턴을 임명했다. 이로써 스크랜턴은 자신에게 집중됐던 과중한 책임을 동료 선교사들과 나누게 됐다.

메리 스크랜턴의 건강 악화

하지만 아쉬운 점도 없지 않았다. 이런 뜻 깊은 연회에 어머니 메리 스크랜턴이 참석하지 못한 것이다. 스크랜턴 대부인은 1901년 연초부터 병이 악화돼 자리에 눕게 됐다. 기력이 쇠해 겨우 침대 밖으로 나올 정도였고 주위에선 ‘봄을 넘기지 못할 것 같다’는 말도 들렸다. 제중원 의사 에비슨까지 방문해 치료를 했으나 차도가 없었다. 연회 중에는 자신이 모금해온 선교비로 건축된 상동교회 ‘미드기념 예배당’ 봉헌식도 참석하지 못한 채 병상에서 봉헌예배 소식을 들어야 했다.

연회가 끝난 뒤에도 병세는 호전되지 않았고 오히려 생명이 위급한 수준까지 악화돼 결국 아들 스크랜턴은 그해 7월 어머니를 모시고 미국으로 들어가야 했다. 에비슨 박사도 귀국해서 치료를 받는 게 좋겠다는 소견을 밝혔다. 윌리엄 스크랜턴은 감회사 직책을 받고 수행할 겨를도 없이 한국을 떠나야 했다.

이듬해인 1902년 5월 연회 직후 한국 감리교회는 충격적 사건을 접해야 했다. 스크랜턴과 함께 한국 선교를 개척했던 아펜젤러가 해상 조난사고로 희생된 것이다. 목포에서 열리는 성서번역자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6월 11일 인천에서 배를 타고 내려가다가 어청도 앞바다에서 선박충돌로 순직했다. 선교회는 이 같은 비보를 접하고 충격에 빠졌고 스크랜턴까지 부재한 가운데 선교사들의 공허감과 상실감은 커졌다.

미국 선교본부는 간곡하게 스크랜턴이 하루 빨리 복귀하기를 요청했으나 그는 즉답을 피했다. 오히려 이듬해인 1903년 3월 스크랜턴은 선교본부에 한국 선교사직을 사임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어머니의 건강이 회복되지 못해 떠날 수 없는 형편이었거나 한국선교회와 미국 선교본부와의 관계에서 문제가 있어 복귀를 결정할 수 없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덕주 교수(감신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