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의헌의 성서 청진기] 잊지 않으려면

입력 2015-06-27 00:44

유대인의 삼대 명절 중의 하나인 초막절은 출애굽을 기념하는 날이다. 40년 광야 텐트생활의 어려움을 기념하고(레 23:34∼43) 추수 감사도 겸하여 지킨다고 들었다. 이처럼 한 사건에서 기쁨과 고통을 동시에 기억하는 명절은 한국에는 없어 보인다. 한국인은 전통적으로 고통을 표출하기보다 부정하고 억압하는 쪽으로 해결해왔다. 그래서 한의 정서가 몸에 익숙하다. 어떤 고통스러운 일이 있다면 가장 당연한 조언은 ‘잊으라’일 것이다. 그것도 가급적 빨리 그러라고 한다.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상당히 전투적인 6·25 노래를 불러오던 세대의 나이지만 잊지 않는 것은 잊는 것보다 어렵다. 직접 6·25 전쟁을 경험한 사람들이 줄어들고 있으며 한 사람도 남지 않는 시대가 올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전쟁의 상흔을 그저 자료를 통해 간접적으로 접하게 될 것이다. 6·25만 그러하겠는가. 다양한 국가적 재난이 있어왔지만 얼마 지나면 무슨 교훈을 얻었는지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유념하지도 않은 채 그저 빨리 잊어버리는 것이 우리의 습관이다.

필자가 유가족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자살예방활동 중에 자살 유가족 지원에 참여하면서부터였다. 비교적 자연스러운 애도와 달리 기간도 길어지고 고통도 더한 경우를 병적 애도 혹은 복잡성 애도라고 부르게 되는데 이러한 평탄하지 않은 애도의 특징은 사별의 경험을 회상하는 것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잘 기억하는 것은 기억력의 문제만이 아니다. 감정의 복잡함과 모순과 혼란을 해결해나가야 한다. 각자 풀어가는 방법은 다 다르지만 기본적인 지침은 동일하며 방향성도 그러하다.

중요한 지침 한 가지를 공유하자면 그 아픈 기억에 좋은 것을 섞는 것이다. 떠난이의 아픔을 회상하면서 힘들어질 때 그 사이에 좋았던 부분이나 그와의 즐거웠던 기억을 추가로 떠올리는 것이다. 둘이 어우러지면 아픈 기억을 덮기만 하지 않고 부드럽게 끄집어낼 수 있게 된다. 처음엔 안 좋은 게 너무 많아서 잘 안 되지만 차츰 좋은 것들이 잘 버무려진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아픔의 기억을 기억할 명절이 필요하다. 6·25를 회상할 때 전쟁의 고통만 강조하면 다음 세대에서는 누구도 제대로 기억하려 하지 않을 것이며 기념은 몇 안되는 소수의 몫이 될 뿐이다. 요즈음 사회운동 현장을 가보면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는데 아주 환영할만한 일이다. 국가 재난에서 이러한 접근은 오해받기 쉽겠지만 취지를 잘 전달하며 자리잡아 가면 기념의 진가가 살아나고 오히려 배가될 것이다.

기독교 신앙의 정점은 죽은 자가 살아 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유가족들에게는 위로가 되는 부분이다. 예수님은 아주 독특한 설교를 하신 적이 있다. 부활을 인정하지 않는 사두개인과의 변론에서 하신 말씀이다.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을 말할진대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하시니라.”(막 12:26, 27)

이 구절은 두 가지를 강조한다. 첫째 유대인은 하나님을 말할 때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실제 이 땅을 살아간 사람들을 회상하는 민족적 방식이다. 이 정도는 사두개인도 동의한다. 둘째 예수님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지금 살아 있다고 말씀하신다. 이는 사두개인의 사고 체계를 넘어선다. 관념이 아니다. 우리가 기억하고 싶어 하는 그들은 지금 살아있다.

최의헌<연세로뎀정신과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