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르스 사태 똑바로 보자] 응급실에 ‘입원’하는 나라

입력 2015-06-25 03:00
환자를 이송하는 구급대원, 문진표를 작성하는 환자 등으로 24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응급실 출입구가 붐비고 있다. 대형 병원 응급실의 심각한 과밀 상태는 메르스 바이러스가 폭발적으로 확산하는 데 불씨가 됐다. 이병주 기자
삼성서울병원 응급실 주변이 24일 간이 펜스로 둘러싸인 채 철저하게 통제되고 있다. 보건 당국은 이 병원의 부분폐쇄 조치를 무기한 연장했다. 이병주 기자
충남 금산에서 인삼 농사를 짓는 조모(75)씨는 지난달 25일 오전 삼성서울병원 응급실로 서둘러 이송됐다. 패혈증 증세를 보였다. 조씨는 앞서 대전의 한 종합병원에서 신장투석과 고관절 수술을 받았다. 세균은 이 과정 어디에선가 침투한 것이었다. 패혈증에 걸리면 절반이 죽는다.

대전의 의사들은 더 이상 손을 쓰기 어렵다고 했다. 가족들은 납득할 수 없었지만 우선 다른 병원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조씨는 감염수치가 뛰고 신장수치가 곤두박질쳤다. 환부는 짓물렀다. 천안에서 대전으로 와 있던 아들이 아버지를 구급차에 태워 삼성서울병원으로 옮겼다.

평상복 차림에 의사 가운을 급하게 걸친 신장 전문의가 휴일 오전의 응급실로 불려 들어왔다. 병원 밖에 있다가 갑자기 연락을 받고 온 듯 보였다. 조씨는 여러 합병증 중에서도 신장 상태가 가장 안 좋았다. 서울에 있는 손녀 등이 연락을 받고 응급실로 달려왔다. 1m 간격으로 다닥다닥 붙은 병상들은 대부분이 차 있었다. 보호자들이 간병하다 보면 자연히 옆 병상을 침범하게 됐다.

응급실에는 환자보다 보호자가 더 많았다. 환자 한 명에 보호자는 적어도 두세 명이었다. 환자당 한 명이 병원 규정이지만 지켜지지 않았다. 우르르 몰려와 있거나 떠들썩할 때에만 간호사가 와서 “여기 이렇게 많은 분이 계시면 안 된다”며 대기실로 안내했다. 그래도 다들 두 명씩은 응급실에 들어와 있으려고 했다. 외부인이 응급실에 들어가기도 어렵지 않았다. 출입증을 대야 문이 열리지만 환자가 몰리다보니 드나드는 사람도 많아 문은 수시로 열렸다.

조씨는 응급실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다음날인 26일 일반병실로라도 옮겨진 건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 병원 응급실을 중심으로 대규모 중동호흡기증후군(MERS·메르스) 감염이 시작될 참이었다. ‘슈퍼 전파자’가 되는 14번 환자(35)가 응급실에서 바이러스를 전파하기 시작한 게 27일부터였다. 조씨는 간발의 차로 ‘메르스 지옥’ 한복판에서 벗어난 것이다.

14번 환자는 29일까지 사흘간 삼성서울병원 응급실에 입원했다. 매일 200명 넘게 몰려오는 대형병원 응급실에서 무차별로 바이러스를 퍼뜨렸다. 자신도 몰랐다. 이 병원이 메르스 확산 진원지가 된 배경에는 ‘응급실 입원’이 일상화한 대형병원의 의료 관행이 있었다.

삼성서울병원에서 메르스 감염은 환자, 보호자, 의료진을 가리지 않았다. 의사와 간호사까지 감염됐다는 사실은 조씨 가족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감염된 누군가가 조씨를 진료할지도 몰랐다. 면역력이 떨어진 신장질환자는 메르스에 특히 취약하다. 조씨는 아직 삼성서울병원에 입원해 있다.

"유독 삼성서울병원이 다른 데보다 응급실 시스템이 안 좋다고는 생각을 못했어요. 오히려 낫겠죠. 일단 자본력과 시설이 좋은 편이니까. 그래서 노인들이 지방에서 일부러 믿고 오시는 건데."

조모(28·여)씨는 이런 삼성서울병원에서 중동호흡기증후군(MERS·메르스)이 대규모로 확산된 사실을 이해할 수 없어 했다. 조씨는 지난달 25일 대전에서 이 병원 응급실로 이송된 남성(75)의 손녀다. 할아버지는 메르스 사태가 한창인 시기에 중환자실에 격리돼 있었다. 최근에야 호전돼 약 한 달 만인 23일 일반병실로 옮겼다.

할아버지는 고령에 중환자라서 메르스가 터진 뒤에도 다른 병원으로 갈 수 없었다고 한다. 받아줄 만한 병원도 없었다. 발이 묶이듯 삼성서울병원에 있으면서 조씨 가족은 환자 병세뿐 아니라 메르스 때문에 마음을 졸여야 했다. 조씨는 "메르스나 안 걸리면 다행이었다. 제일 좋은 시설과 병원, 심지어 의료진조차 전염에 대응을 못한다는 게 의외였다. 상징적 사건이라는 생각"이라고 했다.

삼성서울병원 메르스 사태는 대형병원의 왜곡된 응급실 시스템을 부각시켰다. 응급실에 비응급 환자가 넘쳐나고, 큰 병원에 병실을 잡으려고 응급실에 입원하다시피 하는 환자가 많다.

◇대형병원 응급실로 몰려드는 환자들=22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의 응급실 유리문 안으로 보이는 대기석에는 20여명이 앉아 있었다. 대부분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대기실은 가득 찼다. 휠체어를 탄 환자와 타지 않은 환자가 섞여 있었다.

이곳을 찾는 발길은 끊이지 않았다. 한 번은 10분 사이에 환자만 4명이 들어갔다. 팔에 깁스를 한 노인, 다리를 저는 40대 여성 등이다. 모두 혼자 걸어오거나 택시를 타고 왔다. 아주 응급해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암병동에서 CT(컴퓨터단층촬영)를 찍으러 온 암 환자도 있었다. 그는 "다른 촬영실이 꽉 차서 빈자리인 응급실 촬영실로 왔다"고 말했다. 응급실 앞에 멈춰선 택시에서 환자가 내릴 때마다 출입구를 지키는 보안요원들이 작은 탄식을 내뱉었다.

20대 여성 환자의 보호자로 동행한 50대 여성은 경기도 김포에서 직접 차를 몰고 왔다고 했다. 오후 5시쯤 만난 그는 "조카가 장염이 너무 심해져서 어젯밤에 왔는데 지금 겨우 이동식 침대에 누웠다. 응급실에 사람이 너무 많다. 10시간 넘게 기다렸다"고 했다.

◇"외래진료 와선 의사 보기 힘들다"=대형 병원 응급실을 찾는 환자들 사이에는 중소형 의료기관에 대한 불신이 만연했다. 김포에서 온 여성은 동네의원이 매상을 올리려고 건강보험 적용이 안 되는 비싼 약을 준다고 생각했다.

그는 "서울대병원은 응급실 진료비가 비싸도 수준이 높다. 여기선 1차 병원에서 했던 검사지를 가져오면 중복검사도 안 한다. 기다리는 걸 감수하더라도 알아주는 병원에 오는 게 좋다"고 말했다. 서울 중랑구에서 왔다는 강모(58)씨는 "후배가 뒷골이 아프다고 해서 구급차를 불러서 왔다. 큰 병원에서 검사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왔다. 외래 진료는 당일에 와서 의사 보기가 힘들다"고 했다.

동네 병·의원에 대한 불신은 경험에서 나온 경우가 많았다. 아픈 친구를 데리고 왔다는 임모(39)씨는 "동네 의원은 오진이 많다. 제 조카도 처음에는 비염이라고 해 놓고 이제는 큰 병원으로 가라고 하더라. 이러니 (동네의원을 가는 게) 병을 키우는 것밖에 더 되느냐"고 했다.

◇'편법 입원' 창구로 변한 응급실=대형병원 응급실은 입원 경로로 이용되는 경향이 짙다. 유명한 병원에서 치료받으려고 입원 순서를 기다리는 '응급실 뻗치기'까지 만연하다. 신현영 대한의사협회 대변인은 "하루 종일 붐비는 응급실을 중증 응급환자들이 차지하고 있다고 보기 힘들다. 외부에서 대형 병원으로 몰리는 환자들은 응급실을 통해 입원하려고 대기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진단했다.

병원 규모에 상관없이 일정한 건강보험수가는 이런 현상을 부추기는 원인으로 지목된다. 가격 차이가 없으니 대형병원으로 몰려들고, 이 때문에 병실이 부족해지면서 응급실 입원이 우선순위를 받으려는 일종의 편법으로 작동하고 있다. 대형병원 응급실의 만성적 과밀화를 빚는 악순환의 고리는 이렇게 만들어진다.

강창욱 심희정 김판 최예슬 기자 kcw@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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