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길] 이 시대 자산 된 민중운동… 노·학 연대의 틀은 넓었다

입력 2015-06-26 02:47
1980년대 말 대학가에서 벌어진 이한열 추모 집회. 1960년대 이후 20여 년간 강렬하게 전개된 한국 민중운동 역사에서 대학생들은 늘 선두였고 주력이었다. 90년대 이후 ‘386세대’로 명명된 80년대 학생운동권은 현재 우리 사회의 가장 중추적인 세대를 형성하고 있다. 후마니타스 제공
1960년대부터 80년대 말까지 길게 잡으면 30여년, 짧게 잡아도 20여년에 걸쳐 역동적으로 전개된 한국의 민중운동사를 꿰어낸 책이다. 민중운동사를 중심으로 재구성한 한국 현대사라고 할 수도 있겠다.

민중운동사를 사건과 기록, 인물, 연구 등을 동원해 치밀하게 복원하면서도 그 속에 내재했던 열망과 에토스를 강렬하게 그려냈다는 점, 민중운동의 형성과 전개, 영향 등을 ‘민중 만들기’라는 쉽고 참신한 주제로 추출하고 이를 일관되고 포괄적인 이야기로 구성했다는 점, 영어권 독자를 대상으로 출간돼 보편성과 세계성을 확보하고 있다는 점 등이 우선 눈에 띈다.

보다 두드러지는 것은 아주 오랜만에 민중운동이라는 과거의 주제를 불러냈으며 거기에 현재적 의미를 부여했다는 점일 것이다. 그 의미는 “민중운동사를 제외한다면 한국의 현대사는 불완전할 것이다”라는 말에 잘 표현돼 있다. 1960∼80년대 한국의 사회·정치·문화·사상사에서 민중운동은 굵직한 한 줄기였다. ‘386세대’로 불리는 당시 민주화운동의 주역들은 지금 우리 사회에서 가장 중추적 세대를 형성하고 있다. 민중운동사는 이 세대의 내면을 구성하고 있는 이야기와 논리, 정서 등을 설명해주면서 그들의 가능성과 한계를 가늠하게 해준다.

‘민중 만들기’는 역사서처럼 흥미롭게 읽히지만 주석과 학술 용어로 가득한 연구서다. 저자 이남희씨는 미국 UCLA 문리대 아시아학 부교수로 재직 중이다. 대학원 시절부터 한국 민중운동을 연구 주제로 삼아왔으며 그간의 논문들을 모아 2007년 영어로 이 책을 출판했다.

저자는 한국의 민중운동을 “1960년대부터 1980년까지 긴 시간 동안, 각 세대별로 각각 특징을 지니면서, 지속적으로 진행된 사회운동”으로 규정한다. 이어 “세계사적인 흐름 안에서, 특히 세계의 역대 변혁 운동사의 흐름 안에서 거론되어야 마땅한 커다란 사건”이며 “사회변혁의 범위나 권위주의 정권을 타도하는 데 성공했다는 점에서 동유럽 여러 국가나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사례와 같이 좀 더 널리 알려진 민주화운동에 필적한다”고 평가한다.

또 “민중운동의 지평은 정계에 진출한 운동권이 보여 주는 행방만으로 판가름하기에는 그 폭이 훨씬 넓을 뿐만 아니라”, 2014년 홍콩 민주화 시위 이후 홍콩의 출판인이 한국의 민주화운동 경험이 중요한 시각을 제시할 것을 기대한다며 이 책의 번역을 문의한 것처럼 “세계 어디에서, 언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 예측할 수 없는” 세계적이고 미래적인 자산으로 본다.

이 책의 주인공은 민중이 아니며, 과거에 유행했던 민중론을 다시 써보려는 시도도 아니다. 이 책은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대학생과 지식인에 초점을 맞춘다. 당시 대학과 사회가 ‘운동권’이라고 불렀던 이들이다. 저자는 그 이유를 “학생운동은 모든 민중운동 형태의 원형인 측면이 있기 때문”이라며 “이론과 사상을 발전시키고 각종 프로그램을 실행하는 데 학생운동은 전체 민중운동의 선두에 있었다. 학생운동은 또한 민중운동을 위한 ‘묘목원’ 구실을 했는데, 학생운동 출신 가운데 상당수가 학교를 떠나 노동자, 도시 빈민, 여성, 농민 운동뿐만 아니라, 1980년대 말 형성된 화이트칼라 운동 현장으로 자리를 옮겨 운동 영역을 확대했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했다.

이 책은 운동권이 민중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만들고, 민중에 대해 어떤 논쟁을 벌였으며, 민중에 대한 자신들의 고민을 어떻게 실천했는가를 다룬다. 민중운동사를 지배 담론과 대항 담론이 경합한 담론 투쟁으로 기술하는 저자는 민중을 구체적인 ‘실체’가 아니라 운동권이 발명해낸 ‘개념’으로 파악한다. 국가가 주도하는 공식적인 발전 전략과 담론들에 맞설 수 있는 대항 주체로 발명한 것이 바로 민중이었다는 것이다.

1980년대에 나타난 ‘노-학 연대’에 대한 서술은 이 책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가장 열정적으로 쓰여진 부분이기도 하다. 저자는 “80년대를 통틀어 수천 명의 대학생과 지식인이 공장노동자의 세계로 뛰어들었다”며 “당시 운동권이 학생 또는 인텔리 신분에서 공장노동자로 정체성의 급변을 감행했던 행보는-물론 한국 노동 현장의 특수한 상황에서 비롯되었고, 세계적으로 선례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그 규모나 당대 사회에 끼친 영향 면에서 세계 어디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다”고 평가한다.

민중운동은 80년대 말 의회민주주의를 획득하는 성과를 거뒀으나 그 열기는 90년대 이후 급속하게 식었다. 지난 20여년은 한국 민중운동의 신화가 해체되는 시기였고, 민중운동은 이제 희미한 기억으로만 어른거리고 있다. 저자는 ‘20여년의 냉각기 이후’ ‘의심과 냉소, 비판을 거친 이후’ 그래도 여전히 유효하게 남아있는 민중운동의 자산을 소중하게 거둬 담았다.

김남중 기자 njkim@kmib.co.kr